글자 크기 설정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9>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
문대통령 8월초 휴가 때도 만남
“5년 임기 짧아… 청와대 조급할 것
인사 문제 등 참모들 안타까워”
노무현ㆍ문재인, 두 대통령의 동지이자 ‘멘토’인 송기인 신부를 10월 29일 경남 밀양시에 있는 사제관에서 만났다. “대학과 달리 성당 문은 늘 열려있다”며 노 전 대통령을 가톨릭으로 인도한 송 신부는 요즘도 집의 싸리문을 활짝 열어놓고 산다. 밀양=홍인기 기자

“하실 말씀이 많을 텐데요.”

올해 8월초, 송기인(80) 신부를 마주한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운을 뗐다. 휴가 차 머문 경남 진해 해군기지 공관에서였다. 문 대통령의 조심스런 질문에 송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없습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70%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최저임금 인상(8,350원) 논란 탓이 컸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물론 소상공인연합회까지 비판 성명을 내놨고, 보수 언론은 “편의점주와 ‘알바생’이 생존 경쟁에 내몰렸다”고 공격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닥친 첫 위기였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고 여기 저기서 불만이 많으니까 먼저 그런 얘기를 꺼냈을 텐데, 나는 도리어 인기에 관심 갖지 말라고 했지. 지지율을 80~90%까지 받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했어요.” 숫자의 등락에 신경 쓰지 말고 공약대로 개혁해 나가라는 의미였다.

그 말에 ‘노무현의 그림자’가 비쳤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4대 개혁입법’을 밀어 붙이려 노력했지만,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좌초됐다. 임기 중반 이후에는 국회 과반 의석마저 내줬다. 일부 정책은 진보 진영에서도 거세게 반대해 후반엔 아군도 잃은 처지가 됐다. 송 신부는 “대통령 임기 5년이 금방 간다는 걸 노 전 대통령 때 경험했으니, 지금의 청와대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문 대통령도, 날 선 충고 보다 격려를 받고 싶었을 지 모르겠다. 송기인 신부가 누군가.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노무현ㆍ문재인 두 전ㆍ현직 대통령이 ‘거리의 변호사’였던 시절부터 함께 한 동지다. 그를 가리켜 언론은 두 대통령의 ‘멘토’,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멘토가 아니고 친구 아이가. 함께 나라 걱정하고 데모했던. 지주는 무슨! 이파리라고 해라, 이파리.”

송 신부는 노 전 대통령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를 주기도 했다. 2009년 5월 23일, 세례하며 짚었던 그 이마에 손을 다시 얹고 “유스토(노 전 대통령의 세례명)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주님의 품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 것도 그였다.

그 송 신부가 다시 움직인다.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평화 문제다. 연내 출범을 목표로 준비위원회가 꾸려진 ‘한반도 평화 정착 범국민운동’의 이사장을 맡을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 평화 시대를 대비해 국론을 모으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진보 보수를 아울러 정계와 민간의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할 거예요. 평화에는 이념이 없잖아. 대통령이 평화의 중요성을 그토록 알리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팔순 나이가 믿기지 않게 꼿꼿한 송 신부를 10월 29일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의 사제관에서 만났다. 전통가옥 방식으로 지어진 본채 앞에는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작은 뜰이 있고, 한 편에는 아담하지만 멋들어진 정자도 자리를 잡았다. 작은 마을을 산이 병풍처럼 둘러 고즈넉한 맛이 있는 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내 집(봉하마을 사저)이랑 바꿔 살자”고 졸랐다던 이유가 이해됐다.

◇“부마항쟁 기념일, 이번 정부에선 꼭 지정되기를”
송기인 신부의 눈매는 상당히 매섭다. 부산 사투리가 밴 말투도 단호했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인터뷰하는 날도 그는 출타했다가 약속 시간 2분 전, 어김 없이 나타났다. 밀양=홍인기 기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사목에서) 은퇴(2005년)한 지가 벌써 13년 여 되니까 이제는 뒷방에 앉아있는 늙은이지. 근데 부마민주항쟁 주인공들이 기념재단을 만들자면서 이번 만은 꼭 함께 해줘야 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했네(송 신부는 8월 출범한 기념재단의 이사장을 맡았다). 밖으로 불러 내는 일 없게 해달라는 게 조건이었는데 벌써 서너 번 불려 나갔다. 처음이라 하는 수 없대. (웃음)”

-부마민주항쟁이 아직 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했죠.

“이번에는 될 거예요. 국회의원 중에서도 그때 데모하던 친구들이 서너 명 있거든. 국회 일은 그 사람들이 할 거고,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의) 관계자니까 관심을 가질 거고, 시민들도 적극적이니 될 거라고 봐요.”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해 벌어진 시위다. 항쟁이 확산되자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마산ㆍ창원에는 위수령을 발동했다. 당시 ‘현장 시찰’을 갔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학생은 일부일 뿐 시민이 대다수인 시위대의 물결을 보고 민심 이반을 확인해 박정희 ‘제거’를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유신이라는 철벽을 깨뜨리는 틈새를 만든 것이 부마항쟁이지요. 민주화의 열쇠가 된 항쟁이니 당연히 기념을 해야지.”

-그 야만의 시대에 민주화 투사들과 함께 하셨죠.

“그 때를 생각하면 ‘그런 고비를 다 겪고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송 신부는 사제의 길을 유신과 시작했다. 1972년 사제품을 받은 뒤 그의 행보는 줄곧 민주화, 인권과 함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활동한 건 물론 부산인권선교협의회장(1974년), 한국앰네스티 부산지부장(1978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장(1986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1989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부산본부 상임지도위원(1991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 부산연대 공동대표(2000년)를 지냈다.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 빼고 다 가능하다’던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위력 행사로 수사기관에 불려가는 게 예삿일이었다. 송 신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간 경찰과 중정, 검찰에 연행된 게 모두 48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돈 잘 벌고 잘 나가던’ 변호사 노무현을 만난 것도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 사건) 때문이었다.

-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나요, 혹시 가톨릭 집안이었나요?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가톨릭 신자 1호예요. (웃음) 고등학교 3학년 때 주위에 신부들 사는 걸 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기에 적합한 신분이더라고.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게 신부구나 싶었던 거지. 그래서 (가톨릭)신학교를 택했지. 입학 시험 때 신학교 진학하려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더니, 면접 보던 신부님이 웃더라고. 성직자가 돼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착하게 살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당시 동기생 54명 중에 신부가 된 건 16명 밖에 안됐어요. 내가 그 안에 든 거지.”

-어렸을 때 가깝게 지내던 신부가 계셨어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다 부산으로 피난을 오니까 남일초등학교를 군시설로 썼어요. 거기 군인병원 성당에서 사목하던 김남수 신부님과 알게 돼서 가깝게 지냈지. 중학교 1학년 때 그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어요. 아직도 살아 계신다. 연세가 아흔 넷이야.”

-노무현 전 대통령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당시 노 대통령은 개업을 해서 돈벌이를 제법 잘하는 변호사였어. 부미방 사건 변호인단 8명 중 하나로 노무현 변호사가 참여하면서 알게 됐지. 월요일마다 재판이 열려서 끝나고 나면 저녁을 함께 했어. 그런데 한번은 노무현이가 ‘일리아드ㆍ오디세이’ 얘기를 하면서 등장 인물 이름을 술술 다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니 머리가 와 이렇노? 학생 때 읽었다매’ 했더니 그렇대. 내가 ‘학생 때 읽은 걸 지금 다 외우고 있다 이 말이가?’ 그랬더니 이러더라고. ‘읽었으니까 외우고 있죠. 근데 이런 머리 가지고 대학 문도 못 밟아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학은 그렇지만 성당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오라’고 했지. 그 다음에 진짜로 부인이랑 성당에 왔더라고. 나는 세례 희망자들을 1년에 걸쳐서 모두 52시간을 가르치는데, 노무현이는 1년 동안 딱 네 번, 4시간하고 안 나왔다. (웃음) 그래도 아깝잖아. 그래서 노무현이가 사는 동네 신부(고 정명조 주교)한테 전화해서 이런 변호사가 있으니 ‘인수’하라고 하니 세례는 줘서 보내라고 하기에 내가 세례를 했지.”

노 전 대통령의 세례명은 유스토다.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라틴어로 정의란 뜻이기도 하다. 송 신부가 노 전 대통령에게 세례를 준 얘기를 신나게 하다가 이런 일도 있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당선 되고 나서 노 대통령이 당시 김수환 추기경한테 인사차 간 일이 있어. 그런데 그 뒤에 추기경한테 전화가 온 거야. 추기경 하는 말이 ‘그런데 대통령이 가톨릭 신도가 맞아요? 외신 기자가 묻는데 신도라고 해도 됩니까’ 그래서 내가 ‘추기경님, 그 사람 신도보다 더 착합니다. 신도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신도건 아니건 간에 능력이 있으니 대통령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기 뭐 중요합니까’ 하고 웃고 만 일이 있어. 나중에 보니까 그 때 추기경이 대통령한테 ‘하느님을 믿어요?’라고 하니까, 노무현이가 ‘좀 희미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더라고. (웃음)”

◇핵심 찌르는 직설 노무현, 정제된 언어 문재인
송 신부의 사진첩에는 노무현ㆍ문재인, 두 대통령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 가득하다. 윗줄 왼쪽부터 올해 8월초 문 대통령 휴가 때 만나 찍은 사진, 오른쪽은 1997년 12월 송 신부의 회갑과 은경축(사제서품 25주년) 축하 행사에서 인사를 하는 노 전 대통령. 아랫줄 왼쪽과 오른쪽은 2016년 추석 때 문 대통령을 비롯해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과 밀양의 송 신부 사제관에서 식사를 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이다. 시기는 다른데 문 대통령의 옷차림이 같은 게 재미있다. 밀양=홍인기 기자

-아무튼 부미방 사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고 또 신부님하고도 가까워진 거군요.

“(끄덕) 학생사건, 노동자사건, 인권침해사건 이런 게 있으면 계속 변론에 가담했으니까. 그 전까지 돈 잘 벌면서 재미있게 살던 사람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인권문제나 민주화에 몰입하게 된 거지. 본인도 ‘아, 변호사란 게 (돈만 벌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싶었던 거야.”

-변호사 노무현의 첫 인상 기억 나시나요?

“확실히 생각 나는 건 ‘진짜 촌놈이구나’ 했던 거. 그 양반 말을 아름답게 꾸며서 할 줄을 몰라. 생각한 대로 바로 쏴.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러니 언제나 직언을 하지. 근데 그 말이 다 알고서 하는 말이야. 변론할 때도 보면 늘 핵심을 찔렀어.”

-문재인 대통령과는 스타일이 좀 다르지요?

“말을 정말로 정제하고 정제해서 꼬투리 잡힐 일이 없이 하지. 책도 속독을 배웠는지 정말 빨리 읽어. 보통 사람 한 권 읽을 때 그 사람은 네 권을 읽으니까. 산에 갈 때 짐 싸는 걸 보면 성격을 알 수 있는데 깔끔해요. 딱 필요한 것만 싸서,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와서, 계획한 대로 간다고.”

-노 전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할 때도 곁에 계셨죠?

“(1988년 총선 앞두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총재일 때인데 전화가 왔어. 시민운동계에서 인물을 추천해 달라는 거지(당시 ‘양김’은 경쟁적으로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 영입에 공을 들였다). 그래서 내가 노무현을 만났어. (국회의원을) 해보라고. 그랬더니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국회의원 될 생각 없습니다’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래도 니 서울 가보면 다를 기다, 이 순 촌놈아.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했지. 그 때는 결론을 못 냈는데, 며칠 후에 나한테 연락을 했더라고. ‘신부님,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근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국회의원 될 생각은 없고요, 선거운동을 한번 멋지게 해볼랍니다’,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애초에 내정됐던 부산 남구(갑) 공천을 ‘재미 없다’고 바꿔 달라고 (당에 요구)하고는,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실세였던) 허삼수가 출마한 동구로 가겠다는 거야. 나는 그래서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된 기다!”

-노 전 대통령이 가는 길에도 신부님이 기도를 해주셨죠. 서거 당시 연락 받았을 때 기억이 나시나요?

“(2009년 5월 23일) 아침 9시쯤 됐는데, 연락이 왔어. 그 얘기를 듣고 내가 ‘뭐?’라고 되물었지. 부산대병원으로 30분 걸려 달려갔더니, 문(재인) 변호사가 와있고 의사가 검시 중이라고 하더라고. 11시쯤 됐나, 들어가서 보니까 얼굴도 깨끗하니 괜찮아. 어깨에 깊고 큰 멍이 든 것 말고는. 내가 세례 줄 때도 짚었는데… 그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했지. 하느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 달라고….”

-심경이 어떠셨나요.

“책임감을 많이 느꼈지. 검찰에 가기 전에 나한테 연락을 했었어. 노 대통령이 말하기를 시간 되는 대로 신부님한테 다시 전화 드리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는 안 됐던 거야. 바로 가서 위로를 하든, 뭐를 하든 했어야 했지. 내가 내 할 일을 다 못했구나 싶었어. 연락만 기다리다가 그렇게 되고 말았지.”

◇꿈에도 안나오는 노무현 ‘하느님 나라 가서 만나자’
인터뷰를 하는 동안 송 신부의 표정이 가장 푸근하게 누그러진 건 퇴임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제관에 놀러 와 술잔을 앞에 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시절을 떠올릴 때였다. 밀양=홍인기 기자

-가끔 꿈에 나오기도 하나요.

“한번도 못 봤어. 꿈은 안 꿔지고… (한숨) 요즘도 매일 아침 기도를 하는데, 하느님 나라에 가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서도 한다. 촛불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도록 은총을 내려 달라고.”

-노무현ㆍ문재인 두 대통령의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지요?

“그렇지. 그런데 정치 목표는 같아요. 공평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거지.”

-문 대통령이 정치한다고 할 때 뭐라고 조언하셨나요?

“예전에… 그 때는 노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로 기억하는데,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라고 그렇게 주위에서 문 대통령을 설득했어. 사람들이 양산 집 앞에 텐트까지 치고 말이야. 그래도 (출마를) 안 했다. 이 양반 마음이 바뀐 건 노 대통령 죽고 나서야. 우리가, 노 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내가 뛰어 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한 거라.”

-2012년 대선 첫 출마 때는 낙선했지요.

“그 때 내가 보니 (민심이) 불안한 거야. 그래서 선거 전에 친노 그룹 핵심 의원(송 신부는 두 정치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두 사람을 찾아가서 국회의원 직을 던져서 사심이 없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설득했지. 한 사람은 그만 둘 수 있다면서 문제 없다고 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당직만 내놓은 거야. 내가 그 일 때문에 그 사람을 아직도 별로 안 좋아한다. (웃음)”

지난 해 비상시국에서 치러진 대선에 다시 출마해 당선 됐을 때 송 신부는 문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는 말도 않고 도로 끊었다고 한다. 지금 나한테 전화할 정신이 어디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 다음에 식사 자리에서 네 가지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건 노 전 대통령이 당선 됐을 때도 했던 당부예요. ‘돈 모으지 마라’, ‘가족, 친인척을 (권력과) 격리 해라’… 그리고 두 가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웃음)”

문 대통령은 송 신부에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휴가 때 한 번씩 문 대통령을 만나신다고요.

“공식 행사 말고는 청와대에 들어 간 일이 없어. (대통령) 뵐 일이 딱히 없으면 임기 끝까지 안 들어 갈 기다. 휴가 때나 살짝 만나서 할 얘기 하는 기지.”

송 신부는 탁자 위의 책들 사이에서 사진첩을 집어 내밀었다. 문 대통령, 김정숙 여사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문 대통령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나한테 ‘하실 말씀 많지요’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 대통령은 과거 시민운동, 민주화운동 할 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보탤 게 없어. 또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부담이 될 것 아닌가. 가뜩이나 휴가 때 쉬러 왔는데. 그래서 ‘없다’고 했다.

그때 (논란이 됐던) 최저임금 문제도 공약을 실천하는 기다. 공약을 기를 쓰고 지키려는 자세가 필요한 거야. 다만, 미리 중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를 설득시키고 지원 대책도 마련해놓고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좀 선후가 바뀌었지.”

◇“평화에는 이념이 없다”… 범국민운동 출범 준비
송 신부는 요즘도 매일 아침 기도할 때 두 대통령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송 신부가 성서를 펴 늘 간직하는 구절과 문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구절을 찾아 짚고 있다. 밀양=홍인기 기자

-‘한반도 평화 정착 범국민운동’이라는 단체 출범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일을 하는 조직인가요?

“민간주도의 단체예요. 평화니까 우선 중립적인 성격이고. 평화에는 이념이 없으니까. 대통령이 말하는 ‘평화’는 일차적으로 ‘전쟁 없는 나라’지. 결국은 통일로 가야겠지만. 그런데 그 평화의 길로 국민도 함께 가야지. 지도자의 말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국론을 모으는 일을 할 거예요.”

범국민운동의 사무총장이 조계종의 신행 스님인 것도 재미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을 보좌하고 있는 스님이다. 이사장은 가톨릭의 사제이고, 실무를 지휘하는 사무총장은 불교의 승려라니. 신행 스님은 “종교인은 물론 진보와 보수, 여와 야를 포괄해 학자와 정치인, 시민단체가 두루 참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신부님을 일컬어 언론에서 ‘노무현ㆍ문재인의 멘토’라고 하는데요.

“멘토가 아니고 친구지!”

-정신적 지주라고도 하고요.

“지주는 무슨 이파리라고 해라. 바람 불면 날라가는 이파리.”

-문 대통령한테 당부하고 싶은 건 뭔가요?

“걱정되는 바는 건강이야. (문 대통령이) 일에 너무 깊이 빠지면 몸을 놔두니까. 다른 거는 없어.”

-청와대 참모진은 보좌를 잘 하고 있는 것 같나요?

“그 문제는 나도 여론에 공감을 하는데… 인사만 해도 그렇게 사전 검증이 제대로 안되나 싶어. 그렇게 말썽 나지 않을 사람도 충분히 있을 텐데. 참모들이 그런 사람을 왜 못 찾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워. 과거에 청와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들어 갔으면 하는 욕심도 들지. ‘철’들(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그렇고.”

-일각에서는 성직자가 왜 사회, 정치 문제에 간여 하느냐는 시선을 보내기도 하는데요.

“그런 시각이 있지. 사회가 정상적이면 신부들이 (성당과) 사회를 넘나들 필요가 없어. 근데 정상이 아닐 때는 종교인이 아니라도 모든 시민이 다 (거리로) 나와야지. 아무도 횃불을 들 수 없을 때 정의구현사제단이 나타난 거야. 실제로 우리가 데모를 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잡혀가면 죽을 각오로 했어. 사회가 제 길을 찾지 못할 때는 불을 밝혀줄 사람이 필요해.”

-신부님이 지금까지 삶의 푯대로 삼은 성서 구절이 있다면 뭘까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사야서에 있는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2장 4절)라는 구절이야. 나는 죄악 중에 가장 큰 죄를 전쟁이라고 생각해. 지금도 우리가 군사훈련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노.

개인 표어로는 신부가 될 때 받은 구절이 있어. ‘일어나 가자’(마태복음 26장 46절)라는 거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흘리면서 마지막 기도를 한 뒤에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면서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러, 말하자면 죽으러 가시는 길에 말이야. 유신 때 교회에 편안히 앉아 안주했어도 천당에 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했지. 그 때 품은 구절이 ‘일어나 가자’야.”

송 신부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지금의 문 대통령에게 건네고 싶은 성서 말씀을 꼽아 달라고. “이제 그만 하자”고 단호하게 말하며 성서를 덮었던 송 신부는 그 말에 아무 말 않고 다시 성서를 펴서 뒤적였다. 집회서 28장 19절이었다. ‘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혀의 분노에 걸려들지 않은 이는 행복하다.’

송 신부는 혀를 두고 특정 언론을 들었다. “언론이 정말 발목을 많이 잡아. 그래도 이걸 새기고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야.”

그런데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혀로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숨어 기다리는 자 앞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남에게 발목 잡히는 것만 주의할 게 아니라 제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송 신부 역시 이 말까지 해주고 싶었을 터다.

송 신부의 거처 한 편에 있는 정자. 앞뜰과 주변 풍광이 한 눈에 보여 작지만 운치가 있다. 요즘도 식사 때 반주를 즐기는 송 신부는 여기를 “소주 마시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밀양=홍인기 기자

밀양=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