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다산독본] 윤지충, 모친 장례에 상복 안 입고 신주 불태우자... 반격이 시작됐다

입력
2018.11.01 04:40
28면
전북 전주 전동성당 안에 세워진 윤지충(오른쪽)과 외종형 권상연의 동상. 윤지충은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에 따라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큰 변을 당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북 전주 전동성당 안에 세워진 윤지충(오른쪽)과 외종형 권상연의 동상. 윤지충은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에 따라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큰 변을 당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도세자를 모신 궁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마음 씀은 각별했다. 1791년 7월 16일 실록 기사에 궁녀 이씨에게 수칙(守則)이란 작위와 정렬(貞烈)이란 칭호를 내린 일이 나온다. 서대문 밖에 30년째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문 밖 출입을 않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1760년 사도세자의 은총을 받았던 궁녀로,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궁 밖으로 나왔다. 이후 그녀는 죽기로 작정하고 씻지도 않고 빗질도 않으면서 방을 나오지 않았다. 대소변도 방 안에서 해결했다. 이웃에서 불이 나서 불길이 번졌을 때도 방안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놀란 이웃들이 먼저 불을 꺼서 화를 면했다.

30년간 씻지도 않고 머리도 안 빗고, 바깥 햇볕도 보지 않고 살았다면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그림이다. 그녀는 이렇게 세상을 향한 문을 꽉 닫아걸고 폐인으로 살며 죽은 세자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 이야기가 조정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이 움직였다. 채제공이 그 마을에 열녀의 정문(旌門)을 세워주자는 건의를 올렸다. 노론 쪽에서 바로 제동이 걸렸다. 앞서 이진동 사건 당시 그를 죽이려 했던 홍억이 반대 의견을 냈다. 정조는 그녀의 오두막집 앞에 문을 세워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달아 주었다. 그녀에게 종2품의 품계를 내리고, 쌀과 비단과 돈을 넉넉하게 주었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작은 것 하나도 굳이 찾아 드러냈다.

 ◇채제공과 남인당에 대한 견제 

이 일이 있기 11일 전인 1791년 7월 5일에 채제공은 예조판서 서호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동생 서형수가 성천부사가 되어 부임하면서 관례를 무시하고 좌의정 채제공에게 부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임지로 떠났다. 채제공은 이를 자신에 대한 의도적 도발로 여겨 서형수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형 서호수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인사 업무 수행을 거부했다. 인사권을 행사하려면 채제공의 결재 라인에 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채제공은 1786년 자신이 노량진으로 물러나 살 때 서호수의 부친 서명응(徐命膺)이 채제공의 당시 불우한 처지를 안쓰러워하는 말을 했다는 집안 조카 채홍리의 전언을 거론하며 서호수의 이 같은 태도가 온당치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서호수는 아버지 서명응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할 수도 없었다며, 채홍리가 했다는 전언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채홍리 마저 반박하는 글을 올려 전후 사정을 핑계 대며 은근히 서호수의 편을 들었다.

채홍리의 글을 본 정조가 격노했다. “홍리가 어찌 감히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함부로 반박하는 글을 올려 요사스런 작태를 부린단 말인가. 홍리는 그의 숙부 채제공과는 그 의리가 부자간과 같은데, 그 숙부가 신축년(1781) 이후 재난에 빠졌을 때 홍리의 관직은 갑자기 높아져서 경연, 성균관, 비변사, 강원 감사 등의 관직을 제 마음대로 독차지하였으니, 과연 무슨 이유로 그런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가. 숙부를 팔아 영화를 얻고자 이처럼 반대편에 붙어서 그 숙부를 해치는 일이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좌상의 여러 가지 죄안(罪案)은 집안 내의 자잘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홍리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 중간에 근거 없는 말을 주워가지고 돌아가 좌상에게 전해 겉으로 다정한 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 그 자취를 덮으려고 하다가 오늘날의 사단을 만들었다.”

정조는 채홍리만 야단치지 않고, 이 같은 상황을 초래한 채제공의 박절한 처신도 함께 나무랐다. 70을 넘긴 늙은 신하를 믿고 나라 일을 맡겼으면 사(私)를 버리고 임해야 할 텐데 건건이 이렇듯 각박한 사태를 초래하니, 어찌 충후한 기풍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탄식했다.

 ◇채제공의 좁은 품 

채제공은 성격이 불같고 호오가 분명했다. 한번 그의 눈 밖에 나면 배겨날 사람이 없었다. 야인으로 지내며 목숨이 경각에 당했던 시절에 자신을 배반하고 상대 진영에 섰던 자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정조의 입장에서 채제공을 필두로 남인에게 힘을 실어주려던 상황에서, 대채(大蔡)와 소채(小蔡), 채당(蔡黨)과 홍당(洪黨)으로 갈린 남인 진영 내부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도 짜증이 났다. 일치단결해서 밀고 나가도 될까 말까 한데, 툭하면 반목해서 상대를 걸어 넘어뜨리려 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정국 구상에 돌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는 채제공의 이 같은 성정에 대한 증언이 유독 많다. 이종섭(李宗燮)은 어려서 채제공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782년 1월, 조정에서 채제공 제거 논의가 본격화 될 무렵, 그의 부친 이세석(李世奭)이 대궐에 들어갔다가 채제공이 반드시 해침을 당할 것을 알고, 아들 이종섭에게 말했다. “네가 채제공을 탄핵하는 연명 차자(箚子)에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 부자가 죽을 것이다. 스승을 구하려고 아비를 죽일 셈이냐?” 이종섭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제공이 “그마저 서명을 했더란 말이지!”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일 이후 이종섭은 죄인을 자처하며 10여 년간 벼슬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고 근신했다. 정조는 이종섭이 절개를 지키는 모습을 아껴, 그만 용서하라는 뜻으로 채제공에게 여러 번 그에 대해 물었지만, 채제공은 끝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답답했던 정조가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채제공이 이종섭의 일에 끝내 마음을 풀지 않으니 너무 가혹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다산의 사촌처남 홍인호도 정조가 몹시 아꼈지만, 채당과 홍당으로 갈린 이래 채제공은 그에게 깊은 유감을 품어 청요직(淸要職)의 물망이 있을 때마다 그의 이름을 감정적으로 빼버리곤 했다. 정조는 두 사람에게 화해를 명하고, 홍인호 더러 채제공에게 찾아가 지난 잘못을 사죄하게 했다. 왕명에 따라 홍인호가 마지못해 채제공의 집을 찾아갔다. 채제공은 냉랭한 표정으로 날씨 얘기만 했다. 채제공의 딴청에 홍인호는 머쓱하게 앉아 있다가 그대로 일어서 나왔다. 왕명에도 채제공이 화해의 시늉만 하자, 도리어 유감만 깊어졌다. 이 밖에도 그는 자신에 비수를 들이댄 인사들에게는 반드시 앙갚음을 했다. 이재기는 이 기사 앞에 “채제공의 병통은 언제나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는데 있었다”고 적었다. 채제공의 이 같은 좁은 품이 또 한 번의 파란을 만들고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 신주를 불사르다 

조정에서 채제공과 서호수가 중간에 채홍리를 놓고 일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호남의 진산군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천주학을 믿는 윤지충이 제 어미가 죽었는데 상복도 안 입고, 조문도 안 받고, 심지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까지 폐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윤지충은 윤선도의 7대손으로 남인 명문의 후예였다. 부친은 윤경(尹憬)이었고, 그의 여동생은 바로 다산의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윤지충과 다산은 사촌간이었다. 그는 1782년 다산 형제와 함께 봉은사 등에서 보름간 독서하며 지냈고, 1783년 봄 증광시에 급제했다. 그의 주변에는 천주학의 핵심 그룹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승훈은 그에게 고종 사촌 매형이었고, 가성직 제도 하의 10인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항검은 그의 이종사촌이었다. 이벽은 사돈간이었다. 게다가 그의 서울 집은 명례방 김범우의 집 맞은편에 있었다. 그는 다산 형제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광화문에 내걸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그림.교황은 방한 당시 이들에 대한 시복미사를 진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광화문에 내걸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그림.교황은 방한 당시 이들에 대한 시복미사를 진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787년 윤지충은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였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동생을 입교시켰고, 인근에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1791년 5월에 세상을 떴다. 그녀는 임종 시에 장례의 절차를 천주교 교리에 맞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윤지충이 이를 따랐다. 그것은 1790년 10월 말에 두 번째 북경행에서 돌아온 윤유일이 제사와 신주 봉안을 금지한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과 사목교서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올리지 않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웃에 살던 그의 사촌 권상연도 그를 따랐다.

 ◇절호의 기회 

조문 왔던 친지들이 신주도 안 모시고 유교식 제사도 안 지내는 이 이상한 장례에 대해 묻자 윤지충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이며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역에서 명망 높고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이 소문이 점차 퍼져 9월에는 한양 홍낙안(洪樂安)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홍낙안이 누구인가? 정미반회사건 당시 그는 이기경을 부추겨 고발케 하려다 실패하자, 1788년 1월 7일 인일제 대책문에 서학을 추종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고발하는 글을 직접 올려 다산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장본인이었다. 이때 정조는 그의 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산을 높은 등수에 올려 그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홍낙안은 다시 한 번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채제공을 두둔하는 임금의 태도는 확고했지만, 채제공의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정국 운영은 이미 여러 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정미반회사건 당시 미온적인 태도로 물러섰던 이기경도 적극적 태도로 바뀌어 있었다. 채제공은 다산만 아꼈고,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홍낙안의 뒷배였던 홍인호 부자는 왕명에 따라 내키지 않는 사죄를 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 채제공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9월 3일 다산은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거칠 것 없는 승승장구의 기세였다. 서학을 믿는 무리들이 채제공의 비호 아래 왕실의 핵심 요직에 배치되고 있었다.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홍낙안은 이 진산의 풍문을 계기로 천주학의 문제를 다시 한번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궁리를 시작했다. 지난번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 먼저였다. 여론전으로 가자!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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