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격리조치, 가정폭력 참극 못 막는다

입력
2018.10.26 16:27
수정
2018.10.26 23:2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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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 피해자 이모(47)씨는 결혼 생활 내내 이뤄진 가정폭력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마다 ‘공권력’을 찾았다. 그러나 경찰의 긴급임시조치와 법원의 접근금지명령 등 가능한 법적 조치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힘이 돼 주지 못했다. 재범 가능성이 높고 심지어 살해로 이어지는 가정폭력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제대로 ‘격리’시킬 수 있는 방향의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2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사건 발생 3년8개월 전인 2015년 2월 15일 오후 9시20분쯤 이씨는 경찰에 폭행 신고를 했다. 이씨의 유족들은 20년간 이어지던 가정폭력이 이날 유독 심했다고 한다. 지인들과 제주도를 다녀온 이씨를 공항에서부터 기다렸던 김씨는 이어 집에서 이씨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퉁퉁 부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부천 원미경찰서 소속 경찰관은 현장 도착 30분 만에 ‘긴급임시조치’를 내렸다. 출동한 경찰관 앞에서조차 이씨를 계속 폭행하려 하고, 술병을 바닥에 내리치려 하거나 이씨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위협 행동을 멈추지 않아서다. 이씨 역시 “남편이 분노 조절이 안 된다”라며 자신과 ‘분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긴급임시조치는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 거주지로부터 퇴거 및 격리(1호) △피해자 거주지 또는 직장 등에서 100m 이내 접근 금지(2호)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한 접근 금지(3호)를 출동한 경찰이 결정할 수 있는 제도다. 당시 경찰은 현장에서 1, 2, 3호 조치를 모두 내렸다. 다음날엔 바로 이씨가 법원에 임시조치(접근금지명령)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고, 9월엔 이혼까지 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 같은 법적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족들에 따르면 경찰의 긴급임시조치가 내려지고 5시간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공권력을 무시했다. 접근금지명령(기간 1년) 역시 지키지 않았다. 이혼 이후 6번이나 이사를 하고 휴대폰 번호도 수시로 바꾼 이씨를 미행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찾아내고 협박했다. 범행이 이뤄진 등촌동 아파트도 김씨가 이씨 차량 뒤쪽 범퍼에 위치파악시스템(GPS) 장치를 붙여 알아낸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탓에 긴급임시조치 등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긴급임시조치를 어겨도 형사 처벌은 없고, 과태료만 내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받은 경찰청 통계를 보면, 긴급임시조치가 도입된 지난 3년간 긴급임시조치 대상자는 4,634명이고, 이 중 133명(2.9%)이 이를 위반해 신고됐으나 법원의 과태료 부과는 28명(21.1%)에 그쳤다. 미약한 제재마저 거의 내려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정 의원은 “지난해 12월 (긴급)임시조치 위반 시 과태료 대신 형사 처벌을 신설하는 ‘가정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을 발의했지만 심의가 이뤄지지 않아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생겼다”며 “강력한 가해자 분리조치를 통해 극단적인 범죄 피해를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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