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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을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
시각장애인 김혜일씨 점자카드 접근성 높여
울산경찰청 ‘블루보드’ 사적 연락금지법 만들어
[저작권 한국일보]시각장애인(3급) 김혜일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대한극장 앞에서 카드 정보가 점자돌기로 인쇄된 신용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씨는 11개 국내 카드사에 점자신용카드 발급을 요청하고, 피자헛에 시ㆍ청각 장애인을 위한 홈페이지 개설을 요구하는 등 2010년부터 60여회의 민원을 제기했다. 배우한 기자

장애인의 인터넷 접근성 개선 방안을 연구하는 김혜일(38)씨는 열다섯 살 때 각막혼탁을 앓아 양쪽 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 시각장애인(3급)이다. 그러나 김씨의 지인들은 그를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부지런한 민원인’으로 먼저 떠올린다. 김씨는 2010년 이후 60여 차례 공공기관, 민간기업 등에 각종 불편사항을 민원으로 접수해 수많은 변화를 이끌어낸 이력의 자칭 타칭 세상을 바꾸는 ‘프로불편러’이다. 직업적으로(프로ㆍpro) 불편함을 표현하는 사람(er)이라는 의미를 지닌 신조어 프로불편러. 세상은 사사건건 불편사항을 털어놓는 이들을 배척하고 외면해왔지만, 이제 곳곳에서 프로불편러의 용기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꼬치꼬치 불만을 쏟아내 누군가에겐 악성 민원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김씨.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문턱들에 부딪혀 상처를 입어온 시각장애인들에겐 세상을 바꾼 영웅이다.

◇민원제기 60회… 장애인 ‘문턱’ 제거 해결사

서울 은평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일씨는 점자신용카드를 들어 보여줬다. 점자신용카드에는 카드번호, 유효기간, 카드명 등이 점자돌기로 인쇄돼 있다. “개인정보가 담겨 있는 만큼 (점자카드는) 시각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인데, 카드사가 점자신용카드 발급정보를 제대로 안내하고 있지 않았어요. 콜센터에 직접 전화해도 직원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러 차례 문의를 거쳐 겨우 점자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죠.”

김씨의 악착같은 불편접수 덕분에 카드사의 점자카드 발급이 용이해졌지만, 그렇다고 관련 걸림돌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올해 4월 기준으로 11개 국내 카드사 중 8곳에서만 점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그마저도 대부분 카드회사는 점자신용카드를 한두 종류만 발급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은 제휴 포인트, 마일리지 등 일반 이용자들이 누리는 각종 적립 혜택을 소비패턴에 맞게 선택할 수 없는 실정이죠.”

김씨의 민원 내용은 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여달라는 게 대부분이었다. 학창시절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김씨는 점자로 만들어진 수학능력시험 교재를 대여하러 지역 복지관을 찾아다니다 처음으로 문제점을 느꼈다. “복지관들은 각자 소유한 점자책 목록만 가지고 있고, 다른 복지관과는 목록을 공유하지 않고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A복지관에 점자책이 없으면 B복지관을 가보고, 그곳에서도 책을 못 찾으면 C복지관에 무작정 가보는 식이었죠.” 책을 빌리러 다른 곳을 가더라도 원하는 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시각장애인은 기약 없는 발품을 팔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조금만 시스템을 조정하면 될 것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고, 세상은 한 뼘쯤 시각장애인 앞으로 다가왔다. “간단하게 목록만 공유하면 두 번, 세 번 걸음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말을 해야 바뀌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년 화면 낭독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엑스비전 테크놀로지’에 시각장애인 테스터로 입사한 김씨는 국내 컴퓨터 백신 개발 회사들이 시각장애인용 유료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한번 프로불편러의 자질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해당 회사에 관련 프로그램 개발을 문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죠.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질의하는 등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 마침내 시각장애인용 버전 프로그램 상용화에 성공했어요.”

이 일을 계기로 김씨는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면 참지 않고 여지없이 해당 기업이나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차선책으로 인권위로 향했다. 피자헛에 시ㆍ청각장애인을 위한 웹사이트를 개설해달라 요청했고, 웹페이지 본인인증 절차인 ‘캡차(CAPTCHA)’의 그림문자를 읽어주는 음성지원 기능을 모바일 버전에서도 가능하게 해달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단 한 번도 일반 민원으로 일이 해결된 적이 없어요. 인권위를 통하거나 심지어 소송을 진행해야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죠.” 프로불편러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김씨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분야는 영화관 외화 콘텐츠 화면해설 서비스다. “시각장애인들은 자막을 읽을 수 없고, 화면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알 수 없어 외국 영화는 사실상 관람하지 못하고 있어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민원을 넣으려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그는 더불어 카카오뱅크 등 모바일은행이 발급하는 체크카드에도 점자를 새겨주는 서비스 요청을 준비하고 있으며, 시각장애인이 전혀 사용할 수 없는 패스트푸드점 무인판매기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울산지방경찰청 과장급 이하 20, 30대 경찰들이 지난달 11일 6층 대회의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의를 하고 있다. ‘블루보드’ 멤버인 이들은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에 모여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다. 이들이 회의를 통해 마련한 ‘사적연락금지법’은 전체 경찰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울산경찰청 제공

◇“사적 연락 금지” 불편 찾는 경찰들

울산광역시 성안동 울산지방경찰청 6층 대회의실.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이면 젊은 경찰들로 구성된 이곳의 대표 프로불편러들이 모여든다. 지난달 11일 정오. 울산경찰청 소속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로 구성된 ‘블루보드’ 멤버인 20, 30대 젊은 경찰 8명이 회의를 시작했다.

경찰들은 간단한 점심으로 챙겨온 샌드위치와 탄산음료를 손에 들고 연신 자신의 의견을 쏟아냈다. 거침없는 말투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폭소. 직장 회의라기보다 친구들과의 수다가 연상될 정도였다. 하지만 편한 분위기 속에서 이들이 내놓은 의견들은 대부분 울산경찰 전체 조직에 내실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사적연락금지법(내부지침)’ 도입, 구내식단 개선을 위한 시스템 마련, 계급에 따른 불필요한 관행 개선 등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놨다. 보수적인 경찰 조직 입장에서 자칫 이들은 성가신 프로불편러로 여겨질 뻔했지만 가히 혁신에 가까운 성과를 내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맡는 차봉근(32) 경감은 “블루보드 회의 결과는 계장, 과장을 거치지 않고 청장께 직접 보고한다”며 “기존 보고체계를 깼기 때문에 젊은 경찰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이 제안해 지난달 1일부터 전국 지방경찰청 가운데 처음으로 시행에 들어간 울산경찰청의 사적연락금지법은 전국적으로 크게 이슈가 됐다. 이에 따르면 울산 지역 경찰들은 이성 하급자에게 “주말에 뭐하니?” 등 업무 외적인 안부를 묻거나 “너희 집 근처인데 커피 한잔 하자”, “술 한잔 사줄게” 등 사적 만남을 요구하는 연락을 하면 안 된다. 이를 두고 일부 내부 인사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너무 정이 없는 것 아니냐” 등의 반대 목소리를 내며 블루보드 의견을 유별난 것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적연락금지법을 시행한 지 열흘 만에 일선 경찰서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천효진 경장은 “동료들 의견을 들어보면 예전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연락은 거의 개인 카카오톡으로 했는데, 이제는 단체 채팅방이나 내선 전화를 주로 이용한다”며 “개인 카톡을 보내기 위해 프로필을 확인하거나 사진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생활이 보호되는 것 같다며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사적연락금지법에 이어 이들이 추진 중인 안건은 ‘퇴근 인사 없이 퇴근하는 문화 도입’이다. 이날 회의에서도 블루보드 멤버들은 현장 실태부터 적용가능 범위, 방법론 등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예전에는 상급자 방을 노크하고 인사한 뒤 퇴근을 했는데, 요즘엔 그냥 바로 퇴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퇴근은 누구의 허락을 받아 하는 게 아닌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니까요.”(심광우 경위)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계장님 자리가 바로 뒤여서 인사를 안 하고 가는 게 오히려 이상해요. 하다못해 ‘퇴근 안 하십니까’ 정도의 말이라도 하고 가는 게 오히려 속 편합니다.”(조윤정 경장)

40여분간 안건 토론을 마친 이들은 울산경찰청내 2~3개 부서, 경찰서별 부서 1개, 지구대 1개팀 등에 ‘인사 없이 퇴근하기’ 문화를 시범도입해 운영해보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다음 주 안건으로 조ㆍ석회 문화 간소화를 선정했다. 최수지 경사는 “일선 동료들로부터 ‘조회 때 했던 얘기를 석회 때 또 듣는다’는 의견을 들었다”며 “심도 있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저작권 한국일보]모바일 앱 ‘불편함(函)’을 운영하는 닛픽의 김준영 대표, 장대용 최고기술책임자, 남재홍 마케팅책임자(오른쪽부터)가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시민들이 평소에 느낀 불편함을 앱에 적으면 이를 관련 기업이나 자치단체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당신의 불편을 삽니다” 불편 신고 앱 등장

시민들이 느끼는 불편을 구매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민원의 실현을 위해 기업이 움직이는, 진정한 ‘프로’불편러인 셈이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불편함(函)’을 운영하는 ‘닛픽’의 김준영(28) 대표는 “시민들이 지닌 불편사항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앱을 개발했다”며 “소비자들의 불편을 관련 기업이나 기관에 전달하면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불편함’은 매일 주어진 한 개의 주제 키워드에 앱 사용자들이 느꼈던 불편 내용을 답글로 적으면 사용자에게 100원이 적립되는 구조로 운영된다. 예를 들어 지난달 18일에는 샌드위치 전문점 ‘써브웨이’가 앱의 키워드로 올라왔고, 이에 대해 한 사용자가 “30㎝ 크기 샌드위치는 너무 배부르고 15㎝ 샌드위치는 약간 아쉽다. 20㎝ 샌드위치가 나오면 좋겠다”고 적었다. 작성글에 다른 사용자가 ‘하트’를 눌러 공감을 표하면 하트 하나 당 10원씩 추가 적립돼 최대 500원까지 쌓인다. 7월 운영을 시작해 현재 앱 사용자는 5,000여명 정도, 키워드 하나 당 평균 400개 정도 글이 달린다.

운영 초기라 해당 기업이나 기관에 불편사항을 정리해 보내도 적극적인 답변이 돌아오지는 않지만 사용자가 늘고 ‘불편함’이 조금씩 대중에 알려지면서 피드백을 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휴가철을 맞아 올렸던 키워드 ‘해운대’에 “휴지통들이 너무 적다”는 글이 많이 달려 직접 현장답사를 한 후 부산 해운대구청에 문의를 해 ‘쓰레기 관리가 힘들어 관광객이 이를 가지고 돌아가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답을 받았어요. 얼마 전 한 차량공유업체가 택시 관련 불편사항을 수렴해 달라고 의뢰해와 ‘택시’라는 키워드를 올려 이용자들의 의견을 모았죠.”

김 대표의 장기목표는 일상 속 불편함을 공유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일상 속 행복을 공유한다면, 닛픽이 만든 SNS에서는 불편을 공유하게 하고 싶어요. 불편지수를 측정할 도구를 만들어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수치화하고, 이를 축적된 데이터와 함께 사회에 제공하려 합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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