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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것에서 위로받고 싶으면 페소아를 읽으세요"

입력
2018.10.09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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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선집 3권을 번역해 낸 김한민 작가.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그는 “페소아의 시는 쉬운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놀라운 발견의 시”라고 했다. 류효진 기자
포르투갈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선집 3권을 번역해 낸 김한민 작가.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그는 “페소아의 시는 쉬운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놀라운 발견의 시”라고 했다. 류효진 기자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유럽 통합 이전 포르투갈 지폐에 얼굴이 찍혀 있던 국민 영웅이자 유럽 문학 연구자들이 숭모하는 거장. 국내엔 ‘불안의 책’ 또는 ‘불안의 서’로 번역된 아포리즘 산문집의 저자 정도로 알려져 있는, 기이함으로 정평 난 천재. 혹은 광인.

페소아는 요 근래 문학출판계의 뜨거운 이름이 됐다. 그 뜨거움의 8할을 김한민(39) 작가가 만들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는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어쩌면 유일한 국내 페소아 연구자다. 그는 “페소아를 포르투갈어로 읽고 싶어서” 포르투갈 포르투대학에서 페소아 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페소아 빠’다. 페소아 산문집 ‘페소아와 페소아들’(2014)을 번역하고 산문집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複數의 화신’(2018)을 썼다.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페소아는 시, 산문, 정치평론, 희곡까지, 글을 가리지 않고 썼지만, 스스로를 시인이라 규정했다. 미완의 시를 합해 2,000~3,000편을 남겼다. 국내에 소개된 시집은 ‘양치는 목동’(1994)뿐이다. 그나마 절판된 지 오래다. “하지만, 아름다우면서 인쇄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뿌리들이야 땅 밑에 있을 수 있어도/꽃들은 공기 중에서 그리고 눈앞에서 피는 거니까.”(페소아 시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일부) 페소아의 예언이 이제야 제대로 도착한 걸까. 김 작가가 페소아 시선집 세 권을 최근 한꺼번에 냈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이상 민음사)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문학과지성사)다.

1915년의 페르난두 페소아. 민음사 제공
1915년의 페르난두 페소아. 민음사 제공

모두 포르투갈어 원역본이다. 페소아의 시는 어렵기로 이름 났다. 시를 ‘이명(異名)’으로 썼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페소아의 시는 더욱 난해해진다. 이명은 이름, 나이, 외모, 직업, 기질, 문체가 모두 다른, 페소아가 창조한 가상의 작가 혹은 문학적 정체성. 페소아는 평생 100명 넘는 이명을 만들었고,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은 이명은 ‘페소아’를 합해 5명쯤이다. 페소아의 시 세계가 ‘신비의 미로’라 불리는 이유다. 민음사본엔 알바루 드 캄푸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부터 페소아까지, 포르투갈어로 시를 쓴 4대 이명의 시 약 120편이 고루 담겼다. 세계적 페소아 전문가들이 낸 시선집 8권에 공통적으로 실린 시들을 뼈대 삼았다. 문학과지성사본은 페소아가 본명으로 내려다 출판을 마무리하지 못한 시집 ‘시가집’에서 약 80편을 추렸다.

김 작가가 번역한 건 사실상 시인 네 명의 시. 스스로도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가 포르투갈어를 배운 건 2013년쯤부터다. 그는 미술보다 인문학을 더 좋아하는 서울대 미대생이었다. 글∙그림 작가를 하다 페소아에 빠졌다. 페소아를 찾아 포르투갈로 떠났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페소아 같은 언어의 이명을 타고난 건지, 그는 한국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한다. 스페인어를 하는 그는 포르투갈어를 어렵지 않게 배웠다. 아무리 그래도, 5년 만에 시집 번역이라니.

류효진 기자
류효진 기자

김 작가는 포르투갈에서 페소아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페소아 권위자 리처드 제니스와 한 동안 함께 살기도 했다. 페소아의 삶으로 시를 해석했다. 그는 “발로 뛴 번역, 열정이 커버한 번역”이라고 했다. “문맥의 정확성만 염두에 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번역했다. 내 개성이 조금도 배어들지 않게 하려 애썼다. 운율, 라임까지 살리긴 어려워서 상당 부분 포기했다. ‘위대한 작가는 최악의 번역에도 저항하는 힘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페소아라면 번역을 망쳐도 중간은 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 작업이 국내 페소아 연구의 문을 여는 첫 단계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시집은 역시나, 어렵다. ‘관통하는 뭔가’를 찾는 게 쉽지 않다. “의미나 스타일을 파악하려 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아무 쪽이나 펼쳐 읽는 게 방법이다. 페소아에 따르면, ‘시란 결국 없는 것’이다. 이명의 ‘복수(複數)성’을 끌어안고 즐기면 된다. ‘온 우주만큼 복수가 되어라’라고 페소아는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페소아를 읽어야 하나. “우리는 모두 조금씩 페소아다. 풍부한 내면과 다양성을 갖고 있지만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페소아는 닫힌 우리를 열어 준다. 페소아는 우리가 익히 예상하는 것들을 부인한다. 머리가 말랑말랑해지고 싶은 사람, 뜻밖의 것에서 위로 받고 싶은 사람에게 페소아를 권한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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