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중재자와 대변인 사이

입력
2018.10.05 15:11
26면

‘수석 협상가’ 문재인의 중재와 인도로

평양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교착 해소

‘김정은 대변인’ 지적에 안전 운전해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뉴욕 한미 정상회담 이후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뉴욕 한미 정상회담 이후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9월19일 평양에서 진행되던 3차 남북 정상회담의 생중계를 지켜보다가 순간적으로 잡힌 장면에 눈길이 멈췄다. 70분 가량의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에 낭패감 같은 게 묻어있었다. 청와대에서 전날까지 ‘합의문이 나올지 블랭크(빈칸)’라고 했던 터라 ‘합의에 실패했구나’하는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한반도 평화의 분수령이 될만한 역사적 합의를 담은 평양 공동선언이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의 표정은 왜 그리 어두웠던 것일까. 최근 만난 외교안보 전문가의 설명이 그럴 듯했다.

“우리 공화국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많이 과장돼 있습니다. 하나 만들어 쏘고 또 하나 만들어 쏘는 정도지, 쟁여놓고 쏠 형편이 못됩니다. 기껏해야 한 두 개 있는데 미국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핵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 20개 남짓인데 미국은 60개로 확인된 핵무기를 내놓으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던 문 대통령은 깊은 고민에 빠졌고, 그 흔적이 생중계 화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게 전문가의 설명이었다. 핵신고-사찰(검증)-폐기의 프로세스를 고집하는 미국 정부와의 과거 비핵화 협상이 번번이 틀어졌던 이유 또한 저 인식의 격차, 근본적으로는 신뢰의 결여 때문이었다는 건 사실 외교가의 정설이다.

확인할 수 없는 전문가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흥미롭게도 이후 전개 상황은 저 추론의 역(逆)검증을 연상시킨다.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추석 연휴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보인 입장 변화가 단서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입을 통해 “특정한 시설과 무기 시스템에 대한 대화가 진행 중”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신고에 앞선 폐기 논의는 미국의 일관된 3단(신고-사찰-폐기) 프로세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전이었다. 이어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북한 20~60개의 핵 보유’발언과 ‘핵 신고를 미루는 새로운 접근법을 미국에 제안했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실토가 나왔다. ‘신고 대 종전선언’이던 북미 간 교착 국면이 ‘종전선언 대 영변 핵 폐기’로 급변침하는 과정을 문 대통령의 평양 고민과 연결하면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과감한 빅딜 제안을 수용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고민을 듣고 ‘융통성을 발휘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저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단지 추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평양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 복귀함으로써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맡긴 ‘수석 협상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미국 조야에 만연한 우려를 해소하겠다며 대표적 보수 언론인 폭스뉴스까지 상대했고, 중재자의 외연과 보폭을 넓히는 행보로 ‘지역안정의 키 리더’라는 언론의 호평까지 이끌어 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멀다. 김 위원장의 올해 신년사를 기점으로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번지고 있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종전선언과 핵 신고 국면을 넘으면 제재 완화의 난제가 기다리는 ‘네버엔딩 게임’이나 다름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안한 리더십과 북한 정권의 반복적이고 변덕스러운 ‘핵 게임’ 전력을 감안하면 북미 정상이 협상판을 파투내지 않도록 관리해온 문 대통령의 분투가 기적에 가까울 따름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의 구체적 합의를 도출한다면 한반도 평화 협상은 한 고비를 넘기게 된다. 하지만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나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까지 우여곡절이 심했던 터라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방심할 수 없다. ‘시간게임(time game)’을 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꿰뚫어야 하고 미국의 주류 회의론자들을 돌파해야 한다. 그렇다고 개혁개방을 위한 제재완화에 목맨 김 위원장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김정은의 대변인’이라는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가 서로 추월하거나 과속하지 않도록 역사의 운전대를 단단히 잡을 필요가 있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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