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의료계 “생명의 위협받는 상황 
 제압 권한 없는 안전요원 등 한계” 
 정부 “조금 마신 사람도 피해 발생 
 거부당해 사망 때 책임 소재 문제” 
 ‘치료 거부’ 법 개정 움직임 없지만 
 주취 보호자라도 출입제한 목소리 
지난달 31일 경북 구미차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술에 취한 2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한 전공의가 치료를 받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제공

경기 김포시의 한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A씨는 지난해 11월 겪은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당시 응급실 당직을 서고 있던 A씨는 만취한 환자를 진료하며 어디가 아픈지 계속 물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진료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A씨가 ‘내일 술을 깨고 다시 와서 진료를 받으라’고 하자 환자는 표정이 확 바뀌며 호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냈다. “금방 들어갔다 나왔는데 또 열 받게 하네. 교도소 좀 다시 가야겠네.”

A씨는 환자에게서 흉기를 빼앗고 다행히 위기를 벗어났지만 만취 상태의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응급실 의료진이 실제로 상해를 입은 사례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는 경북 구미의 병원 응급실에서 만취 상태로 치료를 받던 대학생이 의료용 철제 트레이로 전공의 김모씨의 뒷머리를 내리쳐 동맥파열과 뇌진탕 등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앞서 같은 달 29일에는 술에 취한 환자가 간호사 등 의료진을 폭행한 사건이 2건이나 발생했고, 그 달 1일에는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만취 환자가 의사를 폭행했다.

응급실 의료진에 대한 주취 폭력이 끊이지 않자 의료계에선 응급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김한준 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료인들은 주취 환자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환자를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안전요원, 폭행이나 폭력이 가해진 후 신고를 받고 달려오는 경찰을 믿고 진료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최석재 김포뉴고려병원 응급의학과과장도 “주취 폭력이 발생하면 모든 응급실 진료가 마비되고 당장 사용해야 할 약품과 컴퓨터 등 집기들이 파손된다”며 “의료진뿐 아니라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현행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응급의료종사자는 업무 중에 응급의료를 요청 받거나 응급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를 하여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하거나 기피하지 못한다. 주취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최근 들어 의료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잇따르자 의료인에 대한 폭행 시 벌금형을 없애고 징역형으로 하거나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는 등의 의료법 및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되고 있지만 치료 거부가 가능하도록 하는 개정안은 나와있지 않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역시 법 개정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복지부 응급의료과 관계자는 “응급실 내 주취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주취 환자의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을 경우 소량의 술을 마신 사람도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하는 등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고, 치료를 거부한 주취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책임소재 문제가 있어 법 개정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환자의 치료 거부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응급실 내 만취한 보호자의 출입이라도 금지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형민 고대구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법에 ‘정당한 사유’일 경우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고 돼 있지만 피상적 내용일 뿐 현실적으로 주취 환자의 치료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며 “술에 취한 보호자만이라도 응급실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그나마 응급실 안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초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령ㆍ시행규칙 개정으로 응급실에 출입할 수 있는 보호자는 1인으로 제한되고 있지만 주취 보호자의 경우 1인일지라도 응급실 출입을 제한하자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 관계자는 “주취 보호자의 응급실 출입 제한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며 “대한응급의학회, 대한의사협회 등 관련 단체들과 협의해 응급실 주취 폭력사태를 차단하는데 노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