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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영역으로 들어온 블록체인… 세계 곳곳서 ‘첨단 민주주의’ 실험

입력
2018.07.30 04:40
수정
2018.07.30 15:3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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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정당 ‘플럭스’의 도전 

 첨단 기술 바탕, 2016년에 창당 

 오프라인보단 주로 SNS로 소통 

 “누구나 원할 때 목소리 낼 수 있어” 

 모바일 투표로 당원이 정책 결정 

 당 정치인은 결정된 정책 대변만 

 사실상 직접 민주주의 실현 기대 

 당원 빠르게 늘어 “3당 도약 목표’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호주 시드니에서 가장 높은 집값을 자랑하는 하버브릿지 북측. 그 중에서도 노른자위로 꼽히는 라벤더 베이에는 현대적 디자인으로 눈길을 끄는 복합사무공간 ‘워크 잉크’(WORK INC)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창고로 쓰이던 낡은 건물을 사무공간으로 개조한 워크 잉크는 요즘 호주에서 뜬다는 신생벤처기업(스타트업)들이 앞다퉈 입주하려는 곳이다.

지난달 찾은 워크 잉크 3층의 한 사무실에서는 세 명의 직원이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을 만드는 스타트업 시큐어 보트(Secure Vote) 소속으로, 호주 소수 정당 ‘플럭스’(FLUX)의 지도부이기도 하다.

평소 시큐어 보트 사무실로 쓰이는 이 곳은 때때로 플럭스의 중앙 당사로도 변한다. 정보기술(IT) 업계 출신으로 시큐어 보트 최고경영자(CEO)이자 플럭스 대표를 겸하고 있는 네이선 스페타로는 “플럭스는 퀸즈랜드 등 네 개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소통하고 한데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며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정당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호주 소수 정당 플럭스의 투표 시스템을 만드는 '시큐어 보트'는 호주 시드니 라벤더 베이에 위치한 스타트업 공동 입주공간 '워크 잉크'에 사무시를 두고 있다. 정보기술(IT) 엔지니어 출신인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는 시큐어 보트의 최고경영자(CEO)도 겸하고 있다.
호주 소수 정당 플럭스의 투표 시스템을 만드는 '시큐어 보트'는 호주 시드니 라벤더 베이에 위치한 스타트업 공동 입주공간 '워크 잉크'에 사무시를 두고 있다. 정보기술(IT) 엔지니어 출신인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는 시큐어 보트의 최고경영자(CEO)도 겸하고 있다.

 이슈 기반 직접 민주주의 실험 

플럭스는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던 2016년 호주 정계에 처음 등장했다. 보수ㆍ진보 이념으로 구분되는 양대 정당(자유당ㆍ노동당)뿐 아니라, 노동이나 환경 등 특정 분야에 초점을 맞춘 기존 소수 정당들과도 확실히 차별화되는 정체성으로 화제를 모았다. 바로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통해 모든 당원이 정책마다 한 표를 행사하는, 이른바 ‘이슈 기반 직접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이다. 스페타로 대표는 “지금 우리가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선거에서 한 표를 던지는 것뿐이고, 실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데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지 않느냐”라며 “누구나 자신이 원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플럭스의 목표”라고 했다.

플럭스 당원들은 투표하고 싶은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대신 투표할 수 있도록 투표권 양도도 가능하다. 스페타로 대표는 동성혼 허용 문제를 예로 들며 “법안이 통과돼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이 이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주자는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동성혼 허용 또는 불허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이들이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는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체라면서도 사실상 선거 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플럭스를 창당했다. 그는 "플럭스에서는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을 통해 누구나 자신이 원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네이선 스페타로 플럭스 대표는 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체라면서도 사실상 선거 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플럭스를 창당했다. 그는 "플럭스에서는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을 통해 누구나 자신이 원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정치인은 투표 결과를 대변하는 역할만 

플럭스 소속 정치인은 당원들이 이렇게 투표로 결정한 것을 ‘대변’하는 역할만 맡는다. 일단 선출되면 자신의 뜻에 따라 정치 활동을 펼 수 있는 다른 정당 소속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자율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선거에 나설 후보자는 스페타로 대표와 맥스 카예 부대표를 포함해 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진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면 시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플럭스의 철학에 동의하는지,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편향되지 않았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후보로 공천이 확정되면 “당원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시 즉시 사임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해야 한다. 이 모습은 녹화돼 남겨진다.

물론 이런 기록만으로 변심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선출된 뒤 탈당을 해버리거나, 당원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더라도 사임하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페타로 대표는 “플럭스의 뜻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해 내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라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플럭스가 아닌 다른 정당을 택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플럭스 당원 가입을 독려하는 홍보물. 플럭스 당원들은 선거철에만 투표권을 갖지 않는다. 이슈마다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통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플럭스 제공
플럭스 당원 가입을 독려하는 홍보물. 플럭스 당원들은 선거철에만 투표권을 갖지 않는다. 이슈마다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통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플럭스 제공

 “2년 내 녹색당 꺾고 3당 도약 목표” 

플럭스는 2016년 총선에서 모든 주 상원의회에 2명씩의 후보를 냈다. 그러나 평균 0.15%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지난해 치러진 서호주 선거에는 총 24명의 후보가 도전장을 냈다. 여전히 당선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평균 득표율은 0.44%를 기록해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성장잠재력은 상당히 크다고 플럭스는 설명한다.

현재 플럭스 당원은 7,000명 정도다. 스페타로 대표는 “선거철이 아님에도 지난 한 달 동안만 30여명이 늘었다”며 “애초 목표했던 것보다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향후 2년 내 3만여 명의 당원을 둔 녹색당을 꺾고 당원 수 기준 제3당으로 올라설 것으로 플럭스 측은 기대하고 있다. 당장은 한 사람이라도 의회에 진출시키는 게 목표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체 의석을 플럭스 소속으로 채우겠다는 포부다.

호주 정치권과 시민들도 대의 민주주의의 약점을 해결하려는 플럭스의 정책 민주주의 실험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시드니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플럭스 당원 사무엘 쿠퍼씨는 “더 이상 우리는 정치인 개인을 믿을 필요가 없다”며 “이슈마다 나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관심도 더 높아졌다”고 했다. 제이슨 포츠 RMIT대 교수는 “플럭스가 실제로 정치인을 배출하기 시작하면 일부 정치인들에게 쏠려 있는 주권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드니=글ㆍ사진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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