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극복하려면… 내 느낌보단 내게 중요한 것을 찾아 다가서야

입력
2018.07.16 23:32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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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⑦이강욱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인간은 꽤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지금 없는 것을 진짜처럼 믿을 수 있다. 상상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으슥한 곳에서 강도에게 칼로 찔렸다고 해 보자. 그 날은 매우 운이 나빴다 치자. 그런데 그 날 이후로도 계속 밤중에 한적한 곳에 가는 것이 겁날 것이다.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가. 사실 사건 전날까지 무수한 날 동안 편한 마음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사건 다음 날부터 갑자기 칼을 든 강도가 나타날 확률이 높아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이 달라진 걸까. 깜짝 놀라는 충격의 느낌표가 붙어 있는 기억이 생겼다. 그 뿐이다. 인간은 느낌이나 기억 같은 내적 체험을 진짜로 여긴다. 지금 여기에는 칼을 든 강도가 없다. 인간은 과거 기억만으로도 겁에 질린 채 옴짝달싹 못할 때가 있다.

더 곤란한 문제가 있다. 인간은 최고의 문제 해결사다. 외부 현실의 위험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구할 수 있다. 정 안 되면 돌아가거나 도망치면 된다. 문제 해결에 자신이 있다. 그런데 마음속의 충격과 공포에서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인간은 생각, 느낌, 감정과 같은 내적 체험도 바깥에 있는 물건처럼 여기고 치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불안, 떨림, 긴장, 무기력이 느껴지면 그 느낌을 없애려 한다. 두려운 느낌을 휴지통의 쓰레기처럼 불로 소각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이런 노력은 잠깐은 성공한 듯 보일지라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매일 체험하고 있다. 재난 경험자도 현재를 살아간다. 시간상으로 재난은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끔찍한 기억이 함께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되살아나 그 날로 소환한다. 덫에 빠진 듯 절망적이다. 희망은 없는 걸까.

모든 인간은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은 다가가거나 물러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다가가고, 생존을 위협하는 것에서는 물러난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 온 몸에서 힘이 솟구친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면 내 몸이 아무리 녹초가 돼도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재난 경험자들이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대신 도망가는 움직임에 집착할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조나단 포어의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보면 재난 경험자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9ㆍ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 오스카는 말한다. “일년이 지났어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샤워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현수교, 세균, 비행기, 불꽃놀이, 지하철의 아랍인, 비계, 하수구, 주인 없는 가방, 신발, 콧수염을 기른 사람들, 연기, 매듭, 높은 건물, 터번, 나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재난 기억은 일상에 파고 들고, 전염돼 생소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무서움에 세상에서 자꾸 단절돼 자신에게 매몰되는 것, 그것이 트라우마다. 그렇지만 내면의 고통은 없애려고 애쓴다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 살아가기다. 내 느낌, 생각이 아닌 내게 가장 중요한 대상을 찾아 다가가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가치나 의미라고 한다. 나는 수년째 세월호 유가족 분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절절하고 찢어지는 가슴의 통증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행동한다. 그날에 묶이지 않고 나아간다. 진실을 알리고 싶어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하고, 이웃을 돌보며 사회와 소통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목도리 뜨개질을 하고, 벼룩시장을 열고, 기부금을 부지런히 모은다.

어느 분이 “우리는 국민에게서 너무나 많은 걸 받았으니 이제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이 정말 위대한 존재임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정작 희망과 용기를 배운 쪽은 나 자신이었다. 큰 행운이었다.

이강욱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강욱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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