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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북한이 정상회담을 가진 센토사는 북위 2도에 위치하고 있다. 거의 적도 선상이다. ‘전쟁’ 운운하던 두 지도자의 악수는 적도의 햇볕만큼 뜨거워 보였다. 동북아 안보지형에도 변화가 어른거린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강렬한 빛은 짙은 그림자도 만들었다. 북한을 세계 9번째 핵 국가로서 무대에 등장시킨 것이다. 북한은 2017년 말 핵무기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의 핵 보유는 한ㆍ미의 현 정부보다 이전 정부들의 실패와 방관에 더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북한을 사실상의 핵 국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4ㆍ27 판문점에서 시작하여 6ㆍ12 센토사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되었다.

이제 빛은 두고 그림자는 지워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그래야 북ㆍ미의 ’새로운 관계’도 한반도의 ’평화 번영’도 만들 수 있다. 열정적 기도문들이 즐비하지만 냉정한 상황판단과 현실적 대책이 더 필요하다. 우선 세 가지 문제부터 짚어 보자.

첫째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이다. “남측엔 미국의 핵우산이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우산을 만들 수밖에 없다.” 북한이 협상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해온 주장이다. 남북 공히 핵우산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미국의 핵우산인가. 북한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국 함정ㆍ항공기의 한국 전개는 물론 괌 등 태평양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도 반대한다. 주한미군을 즉각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해외 배치 군대에 대해 유사시 핵무기로 지원하는 정책을 바꿀 수 없다. 한반도 비핵화가 주한미군 문제와 연결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둘째는 안전보장, 즉 안보의 범위이다. 냉전시절 미·소 협상에서 해석의 차이를 보인 대표적인 용어가 ‘안보(security)’였다. 러시아어로 ‘안보(bezopasnost)’는 위험이 없는 상태, 즉 ‘총체적 안전(total safety)’을 의미한다. 북한의 ‘안전보장’은 이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영토보전과 국민안전의 범주를 넘어 독재체제의 유지와 집권세력의 생존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언제 어디라도’ 핵 사찰을 허용할 경우 북한 전역을 공개해야 하므로 체제 안전의 위협으로 간주한다.

셋째는 비핵화와 안전보장을 주고받는 시한 문제이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회담을 11월 중간선거까지 활용하고, 이어 합의의 이행 계단을 2020 재선 가도로 이어가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10배 정도는 더 긴 시간을 재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미국 행정부와의 합의가 그 다음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그래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과 구체 합의는 상원의 비준 동의를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당 행정부가 주도한 이란 핵 합의를 트럼프가 파기한 마당에 상원 3분의 2의 동의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민주당은 이미 트럼프식 대북 협상에 강한 제동을 걸고 있다.

이런 난관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국이 미국과 함께 전체 구도를 만들고 단계별 행동도 이끌어야 한다. 그간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지하고 핵 실험장도 폐쇄했다. 이제 한ㆍ미가 행동에 들어갈 단계이다. 8월 ‘을지 프리덤 가디언’ 훈련을 중지할 경우, 북한의 핵 신고와 검증체계 합의 같은 행동을 이끌어 내는 명분이 된다. 만약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 지금의 말과 몸짓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잘되면 그 다음 미국이 제재 해제를 시작하고 북한은 핵 사찰을 수용하는 경로로 갈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김정은과 회담 직후 한ㆍ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하여 미국내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한‧미가 사전 협의하고 공동 발표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트럼프의 일방적 결정을 한국이 따라가는 형국으로는 미국 내부의 정쟁을 넘어 비핵화 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아울러 한국이 여야를 넘어 통합되고 일관된 입장을 보여야 미국의 조야에도 힘을 낼 수 있다. 한반도 문제 최대 당사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기 바란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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