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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타고 14분이면 동탄 맛집 찾아갈 만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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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작성한 맛집 공개는 꺼린다. 자주 찾는 집이지만 방송에라도 소개될라치면 이내 발길을 돌린다. 혼잡과 애먼 기다림이 싫은 이유 외에도 오롯한 정취가 사라지는 게 싫어서다. 상해루가 예외인 건 곡금초 사부의 명성 탓만은 아니다. 경기 남부 최고의 중화요리라는 이름값이 유지되는 시스템 때문일까? 분명 사람은 득시글대지만 언제 가더라도 변함 없는 맛이 객을 반긴다. 기다림 쯤은 감내하는 몇 안 되는 집이다.
중국 바이주나 황주의 매력을 아는 터라 종종 취하고 싶을 때 중화요리를 청한다. 자연스레 혼자 마시기는 부담스러우니 벗을 부르게 된다. 원래 술이란 건 함께 나눠야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은 절감되는 거 아니던가! 다음 날 특별한 일정이 없는 금요일을 선호하면 장소가 경기도 화성이라도 괜찮은 법. 사람 심리라는 게 자주 갈 수 없으면 만남의 순간이 한층 특별해지기 마련이다.
차를 한 대 가져가서 대리비를 나눠 내는 게 편하지만 이번에는 색다른 방법, 그러니까 새롭게 개통한 SRT 고속철도를 타보기로 했다. 당일 취재 현장이었던 워커힐에서 수서 고속전철역까지는 지하철이 애매해 택시를 타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눈이 많이 내리는 주말 오후였지만 베테랑 기사 분은 요리조리 잘 빠지더니 탑승한 지 40분이 채 되지 않아 날 내려줬다. 그것도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택시 승강장에 말이다. 개찰구를 통과해 탑승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을 갈아탔는지 모르겠다. 정말 깊지만 서울 7호선 '숭실대입구'역(45.49m)에 비하면, 아니 국내에서 가장 깊은 부산 3호선 '만덕'역(68.4m)에 비할 바는 아니다.
기분 내느라 고속철도는 미리 특실을 끊어뒀다. 싱글 시트가 편하기도 했고 수서에서 출발하자마자 첫 정거장이 동탄이니 요금 부담도 많지 않을 듯해서다. 요금은 1만900원. 일반실(7천500원)보다 비싸지만 내가 탑승했던 3호차에는 승객이 절반 가량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아 출발한 직후 승무원이 간단한 스낵과 건조 과일이 든 박스와 생수를 가져다 줬다. 맨 앞쪽 의자를 제외하고는 개별 모니터는 없었고 잡지 한 권이 등받이 그물망에 들어 있었다. 다들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뭔가를 읽는 풍경이다. 나? 뭔가 볼 겨를도 없는, 말 그대로 찰나였다.
서울 수서에서 출발해 정확히 14분 03초(출발 직후 스톱워치를 눌러뒀다)면 경기도 화성에 도착했다. 도로 40~50m 아래로 착공해 완전 지하로만 다닌다더니 정말 흘러가는 풍경 하나 감상하지 못했다. 수서역 자그마한 아파트가 8억이 넘었다니, 동탄 지가가 어떻다니 하는 건 내겐 다른 세상 얘기일 뿐이다. 22년지기 친구 넷과 ‘아재 모임’을 앞둔 기분 좋은 설렘만 가득하다.
고난은 동탄역에 내린 직후부터 시작됐다. 도무지 상해루에 갈 교통편이 없는 거다. 젖과 꿀이 보이는 가나안이 눈 앞에 보이는데 거센 강물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는 기분이 뭔지 알았다. 카카오택시, 우버블랙, 역 앞에 뻗치기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지만 차는 잡히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날은 숨만 내쉬어도 뽀얀 김이 콧수염에 몽글지는 날씨. 고집하면 알아주는 나이기에 무려 한 시간을 바깥에서 서성이며 탈출을 모색했다. 그 사이 5분 차이로 함께 타기로 했던 기차를 놓쳤던 친구가 동탄역에 도착했다. 같은 시각, 집이 분당이라 택시를 타고 먼저 도착해 자리를 맡은 친구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기업을 인수합병 했던 두뇌도, 영화판에서 놀던 가락으로 게임 시나리오까지 쓰는 섬세함도, 노상 해외를 다니며 컨설턴트로 활약하는 근면함도 소용이 없었다. 다 큰 남자 여럿이 동탄을 구석구석 누비는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건 예정보다 2시간이 초과된 후였다. 앞서 좌불안석 친구는 “삼십 분 가량 버티다가 길게 늘어선 줄에서 쏴대는 레이저를 의식해 원탁 테이블을 양보했다”고 우리가 들어서자 원망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언제나 그랬듯 식사는 훌륭했다. 시장이 반찬인 상황이었지만 거한 저녁을 먹은 뒤에라도 상해루의 멘보샤를 덥석 베어 물면 따스하고 바삭거리는 풍미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이다. 게살스프는 애피타이저마냥 멘보샤를 먹은 뒤 살짝 밴 기름기를 지워내기에 좋다. 바깥에서 떨었던 몸이 진정되기 시작하면 자그마한 잔이 한 순례 돌 차례. 오늘의 술은 친구가 출장에서 들고 온 58도 금문고량주인데 곁들이는 최고의 추천 메뉴는 기아해삼이다. 처음 그 이름을 접했을 때는 “자연에서 잘 먹지 못해 살짝 마른 해삼인 건가?” 웅얼거렸지만 요리의 유래를 알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에 인수되기 한참 전 김선홍 전 회장이 항상 찾았던 메뉴라고 해서 이름이 기아해삼이란다. 기아자동차가 로터스 엘란의 라인을 가져와 스포츠카 불모지에 증설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이런 게 좋다. 음식 하나에서 유래와 과거의 흐름을 되새겨볼 수 있는 전통 말이다.
입맛이 촌맛이라 탕수육과 자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여느 집과는 달리 탕수육은 찰싹 달라붙는 찹쌀 느낌이고 자장면은 어린 시절 졸업식 때 어머니가 사준 그 맛을 얼핏 닮았다. 마파두부와 살짝 고민하긴 했으나 추억은 어쩔 수 없다. 각자 하나씩 시킨 식사까지 마쳤지만 아직 술이 조금 남았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해물누룽지탕을 시켰다. 돌솥비빔밥을 먹고 뜨거운 물을 부어 숭늉을 만들어 식사를 마무리하는 우리네 식단과도 닮았다. 풍부한 해물에 고소한 누룽지가 끈적하게 뒤섞인 스프는 고도주의 독함을 달래주기에 그만이다.
22년 동안 쌓였던 캐 묵은 추억을 안주 삼아 3시간 동안의 만찬이 끝났다. 우리 모임에서는 팔자에도 없는 기자 친구 때문에 누구 하나 큰소리치며 술 한잔 쏘겠다고 하지 않는다. 먹성도 비슷한 터라 누군가 계산하면 머릿수로 나눈 뒤 계좌로 보내주는 식이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서로 부담주지 않고 기분 좋게 나눠낼 수 있는 구조라 ‘김영란 법’의 대상자인 게 편하기도 하다. 다들 유부남에 속내는 엇비슷할 테니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순기능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 특유의 2차 문화를 오늘도 어김 없이 실천했다. 동탄에서는 서울 들어가는 택시가 거의 없어 분당으로 나왔다. 화덕피자와 수제맥주로 마무리를 한 뒤 새벽 2시에서야 모임은 끝났다. 각자 택시를 부르고 서울로 향하는 길, 홀로 웅얼거린다. “이런 게 인생이지. 사는 게 뭐 별건가!”
최민관 기자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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