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정부3.0’이란 거대한 벽

입력
2015.11.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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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3.0 홈페이지 캡처
정부3.0 홈페이지 캡처

‘올바른’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데 쓴다며 정부가 편성한 교과서 국정화 예비비 사용내역이 기자는 진심으로 궁금했습니다. 정부는 현재 교과서 예비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라는 야당의 요구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는데요. 국정화 예비비 사용내역에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기에 공개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교과서 만드는 데 드는 돈이라면 인건비, 인쇄비 정도일 텐데 말이죠.

예비비는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정부가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또는 예산초과지출에 충당하기 위해 편성하는 예산’입니다.

한국일보 : [뒤끝뉴스] 국정화 예비비 논란 완전해부

한마디로 비상금인데요. 교과서 만드는데 무슨 급전이 필요하다는 걸까요. 그리고 왜 사용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걸까요.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에서조차 밝히지 않는 정보를 언론에 밝힐 리는 만무했습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시도하다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취재 목적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납세자로서 정부가 세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정부가 국회의 공개 요구는 거부해도 정보공개 청구에는 응할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도 품었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사전에 국회에 예비비 사용 내역을 공개한 적이 없다(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됐지만)”면서 공개를 거부하고 있지만 “정보 공개의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될 때는 예비비 내역을 공개하기도 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재부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ㆍ올해)이나 태풍 피해복구(2012년) 천안함(2012년) 신종플루(2009년) 때 책정한 예비비는 외부 요구 없이도 스스로 공개했습니다.

지난 1일 정보공개 청구를 시도했습니다. 우선 ‘대한민국정보공개’웹사이트에 접속했습니다. 웹사이트는 ‘좀 더 편리한 서비스 이용을 위해 가입을 하라’고 유도했습니다.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생년월일과 집주소까지 적으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기자가 정보공개를 청구한 정부기관은 국무총리비서실, 기획재정부, 교육부 3곳. 국무총리실은 지난달 13일 국정화 예비비 안건을 의결한 국무회의의 주무부처입니다. 교육부는 국정화 예비비 사용을 요청한 곳이고, 기재부는 교육부 요청을 받아 예비비 사용 내역을 심의한 기관입니다.

정보공개 청구 제목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비비 세부 내역’입니다. 청구 내용은 ‘2015년 10월13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예비비의 총액과, 예비비가 쓰이는 세부사업. 그리고 세부사업별로 총사업비, 사업기간, 사업시행방법, 사업시행주체, 사업수혜자 정보’이고요. 정부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때 적어내는 목록을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세세한 정보를 다 알려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구체적으로 청구를 해야 ‘부분 공개’결정이 났을 경우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청구 결과는?

그리고 하루 뒤인 2일. 국무총리비서실에서 가장 먼저 통지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교육부로 청구를 이송한다’는 실망스런 소식이었습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한 지 사흘 만인 4일엔 교육부에서 통지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비공개결정’통지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는 아니지만 ‘부분 공개’도 아닌 전면 비공개 결정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교육부 교과서정책과가 밝힌 비공개 사유는 더 힘이 빠집니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비공개대상정보)제1항제5호(감사·감독·검사·시험·규제·입찰계약·기술개발·인사관리·의사결정과정 또는 내부검토과정에 있는 사항 등으로서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 · 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에 의거 비공개 대상임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제 9조5항을 ‘복사+붙여 넣기’한 무성의한 답변입니다. 국정화 예비비 지출 내역이 ‘감독이나 검사, 시험, 규제’ 등에 해당하는 건 아닐 거고, ‘의사결정과정 또는 내부검토과정에 있는 사항’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한 것일 텐데요.

예비비는 지난달 13일 이미 국무회의 의결로 승인이 된 사안입니다. 예비비는 본 예산과 달리 국무회의 의결이 국회 승인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예비비 총액과 사용 내역이 ‘확정’됐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의사결정과정 또는 내부 검토과정에 있다’는 이유로 거부한 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공개는 못하더라도, 공개를 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만이라도 명확히 설명해달라’는 취지로 이의 신청을 하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인 5일, 이번엔 기재부에서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부분 공개 결정’. 의외였습니다. 기대감을 갖고 정보공개청구 웹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기재부 교육예산과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청구인님, 안녕하십니까? 청구인님께서 11월 1일 우리부에 정보공개 청구한 사항 중 올바른 교과서 예비비 총액은 44억원임을 말씀드립니다.’

나머지 정보는 비공개 결정 됐습니다. 다음은 비공개 사유입니다.

‘현재 내부검토 및 의사결정과정에 있는 사항으로 구체적인 정책안을 마련하기까지 향후 관계기관간 협의와 의결조율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현 시점에서 위 내용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허탈했고, ‘약 올리는 건가’ 하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국정화 예비비 총액이 44억원이란 사실은 이미 국회와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면 예비비 총액이 44억원이라는 사실마저 공개하지 않았을 것 같긴 합니다.

기재부는 그나마 교육부와 달리 법 조문을 ‘복사+붙여넣기’하지는 않았지만, 비공개 사유의 내용은 교육부와 대동소이했습니다. 이의 신청을 했습니다.

쓴 뒷맛만 남긴 정보공개 청구

이의 신청을 했지만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자는 이번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받아 보면서 ‘시간 들여 정보공개 청구를 해 봤자 비공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론 이런 시간낭비를 하지 말자’는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보공개법 3조는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 등을 위하여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적극적으로 공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멋진 말에 기대를 품고 정보공개를 청구했다가 비공개 결정을 받아 든 수많은 사람들이 기자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슬로건인 ‘정부 3.0’의 정의는 ‘신뢰받는 정부, 국민행복 국가라는 비전을 갖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공공정보를 적극 개방ㆍ공유하는 것’인데요. 군사나 외교 관련 기밀도 아닌, 국정화 예비비 사용내역조차 조금도 공개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허울 좋은 수사(修辭)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정부가 간과 쓸개까지 보여줄 기세로 정보공개 의지를 피력하더라도, 통치자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정보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힘이 정부엔 있고, 시민으로선 그런 힘 앞에서 무력할 따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법’(法)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 죽어간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세종=이성택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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