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콘트라베이스는 한 대로 된다

입력
2015.10.13 13:28

콘트라베이스 네 대를 연극에 쓰려고 했다. 근사해 보이겠지 싶었다. 작곡가도 멋진 일이라며 거들었다. 어느 날 피디가 불렀다. 다시 고려해 보시죠. 예산 때문이냐. 아니다. 왜냐. 사실은 다른 데서 그렇게 공연을 했는데 지루했고 성과도 별로였다.

그 말을 듣고 낙담했다. 콘트라베이스를 쓰는 계획도 여러 번의 음악회의 끝에 나온 결과다. 누군가 먼저 시도했다는 말이 자꾸 걸렸다. 급히 불안해졌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고 이제는 악기를 결정해서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데. 스트레스 탓일까,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곧장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깜짝 놀랐다. 어제의 고민이 온데간데없다. 그냥 하면 되지 않나. 처음이 아니면 또 어떠랴. 우리는 콘서트가 아니라 연극을 하지 않나. 생각대로 가자. 다시 모여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밀어붙이는 나의 고집에 모두가 시큰둥이다. 난감해진 그 때. 작곡가가 문득, 한 대는 어떨까요. 순간, 그의 말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한 대라고! 마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말 같았다. 그토록 훌륭한 발상을 하다니! 콘트라베이스 한 대라고!

왜 한 대를 생각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중극장이라는 강박관념이 작용했다. 빈약해 보였다. 당연히 한 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꽉 잡았다. 그 초기의 생각은 나오자마자 무시당하며 버려졌다. 그래서 네 대가 됐다. 그런데 지금은 한 대로도 충분하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때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네 대가 되든 한 대가 되든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조건에 맞추어 연극은 흘러갔을 거다.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한 대가 예전의 그 한 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에 답이 있었다. 왜 이 연극을 하려고 하는가에 답이 있었다. 그 의도와 품은 생각이 분명하다면 풀린다. 곧장 풀리지는 않더라도 그 뜻이 선량하고 교묘하지 않다면 반드시 풀린다. 콘트라베이스 한 대는 당연히 빈약하지만 이번 연극에는 어울린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역사 교과서를 국가가 다시 만든단다.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정부에서 모범적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와 순수가 있다면 왜 불가능하겠나. 그런데 그 풀어가는 논리에 설득이 잘 되지 않았다. 검정 교과서들 가운데 오류와 편향된 시각이 있어 시정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을 필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새로 만들겠다는. 그 말, 참 얼른 수긍이 안 된다.

국정 교과서도 결국에는 사람이 쓰지 않을까. 그렇다면 역시나 편향성이라는 굴레에서 못 벗어날 것이 아닌가. 경제개발 시대의 국정 교과서는 시각 차는 있겠으나 내게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절실했고 머리보다 위장이 소중했던 사십 년 전이다. 지금은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 수많은 증거와 증언, 물증들이 쏟아져 나왔고 연구도 되었다. 손바닥 안에 세계가 들어있고 절대 진리마저 모호해진 다원성의 시대다.

뿐이랴. 2017년부터라니,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밭다. 올 해는 거의 갔다. 1년 동안에 만들겠다는 얘기. 왜 그다지도 후딱 만들려고 하는가. 혼자 쓰는 뮤지컬 대본도 3년 걸린다. 공연까지 수정고가 수십 개다.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일에 단어의 선택, 어미의 뉘앙스, 들어가는 사진 한 장의 크기와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사상적 편향성을 넘어 객관적인 관점의 국사책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1년 동안에 심의까지 거칠 수 있다니, 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잠시 내려놓고 처음으로 가야 한다. 시간과 품이 제아무리 들더라도 검정교과서 제도를 손보는 게 맞다. 그 안에 답이 있다. 날파리 때문에 창문까지 닫아서야 되나. 승자와 패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록이 역사다. 말도 해석도 분분할 터. 당연히 그래야 맞는 거다. 콘트라베이스는 한 대로 된다. 역사책, 한 권으로는 안 된다.

고선웅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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