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품에서 창의력 샘솟아… 야근·회식 줄여야 스마트워크 빛난다

입력
2015.06.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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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오래 지켜야 일 잘한다?

전형적 후진국형 '하드워크' 여전

떠밀려 야근하는 회사원은 나은 편

저임금에 시달려 자원하는 노동자들

가족 와해로 벼랑끝까지 몰리기도

국내에서 일ㆍ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이유는 부실한 사회안전망과 장시간 노동 관행이 뒤엉킨 결과다. 보육ㆍ교육ㆍ의료ㆍ노후 복지가 취약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개인 소득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야근ㆍ주말 근로를 자청하게 된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빈번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근로자의 노력과 이로 인해 가사ㆍ육아를 돕지 않는다는 배우자의 불만이 충돌하게 되면 자녀들은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선을 그어버린다. 이병태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 교수는 “가족의 윤택한 삶을 위한 노동이 오히려 가족관계 단절의 주범이 되는 역설이 바로 우리 현실”이라고 말했다.

스마트 워크보다 하드 워크

한국의 근로형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이다. 일은 많이 하는데 효율은 떨어진다.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세 번째(2012년 2,092시간ㆍOECD 평균 1,770시간)로 길지만 취업자당 연간 노동생산성(6만5,820달러)은 24위, 시간당 노동생산성(30.4달러)은 28위에 그친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효율적으로 근무하는 ‘스마트 워크’보다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을 일하는 것으로 여기는 ‘하드 워크’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족 해체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하드 워크는 한국 사회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먼저 채용과정을 보자. 입사 후 맡게 될 직무 위주로 채용 공고를 내고 구직자도 자신의 경험ㆍ전문성을 고려해 일을 찾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어떤 회사에 입사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때문에 취업과 동시에 ‘○○맨’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직장이 일한 대가를 받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공ㆍ사 구분도 희미해진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직급에 따른 위계 역시 상당해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거나 회식을 마다하는 것은 조직원으로서 공동체를 저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말해온 조직원을 한 순간에 내치긴 어렵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저성과자 퇴출을 위한 끊임없는 내부경쟁구조다. 이병태 교수는 “해외에선 임원 등 고위직이 될 만한 직원을 선별해 그들끼리 경쟁을 시키지만 한국은 한정된 승진자리를 놓고 모든 직원이 다툼을 벌인다”며 “해고하지 않지만,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직원을 내보내는 기업문화 탓에 사회생활은 팍팍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상사가 된 입사 동기나 후배에게 존대해야 하는 낙오자가 짐을 싸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은 상사에게 잘 보이려 출근 시간을 앞당기고, 맡은 업무를 완료해도 일부러 야근하거나, 윗사람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일을 반복한다.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급여와 승진에 결정적인 인사권을 상사가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눈치 보기는 업무 효율성을 떨어트린다. 결과적으로 ‘가족이 있는 삶’과도 멀어지게 만든다.

저임금 노동시장의 덫

상사 눈치에 떠밀려 야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저임금에 시달려 야근ㆍ주말 근무를 자원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도 많다. 서울의 한 우편집중국에서 야간 소포 분류 업무를 하는 박모(51)씨는 “고용불안과 저임금 노동이 가족 와해의 원인”이라고 했다.

박씨는 매일 오후 6시에 출근해 이튿날 오전 5~6시에 퇴근한다. 월급은 180만원 남짓. 기본급 150만원에 매일 3~4시간씩 추가 근무한 수당 30만원을 합한 금액이다. 시급으로 치면 올해 최저임금(5,580원)보다 40원 많다. 그는 “피곤하니까 집에서는 잠만 자게 된다. 주말에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경기의 한 공장에서 시간제로 근무하는 신모(35)씨도 “월급 180만원으로 4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해 아이들과 놀고 싶어도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올해 초 아내가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을 시작한 뒤부터는 서로 피곤해 대화 횟수도 줄었다”고 털어놨다.

통계청이 지난해 8월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최저임금(2014년 기준 5,210원ㆍ월 108만원)의 90~110%를 받는 노동자는 121만명이다. 국내 저임금 노동자(소득이 중위임금의 3분의 2미만) 비율은 2012년 기준 25.1%로 OECD 회원국 중 미국(25.3%)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최재혁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간사는 “가계소득을 높이기 위해 가족 모두가 장시간 노동에 나서면서 대화가 줄고, 서로에게 소홀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사회안전망 구축ㆍ기업 문화 변해야

정부도 이러한 폐해를 인식해 2020년까지 노동시간을 OECD 평균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노동자 4명 중 1명꼴로 고통받는 ‘저임금 노동의 덫’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 같은 목표 달성은 요원하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 선임연구위원은 “일을 많이 해도 급여가 높지 않다는 게 저임금 노동시장의 특징”이라며 “노동시간 단축 목표를 달성하려면 최저임금을 올리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등 노동자들이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근로형태를 직무형 체제로 전환하고, 책임자급 간부들의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조언도 잇따랐다. 김영옥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직급에 따라 맡은 일이 확실한 유럽에서는 퇴근 시간 이후 회사에 남아 있으면 제 시간에 일을 처리하지 못한 무능한 사람으로 여겨진다”며 “직무급제를 도입하면 할 일만 하면 돼 장시간 노동 관행이 사라지고, 단위 노동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수준이 결정되는 현재의 연공급과 달리 직무급제는 맡은 업무를 명확히 구분하고, 그에 따라 급여를 정하는 근로형태다.

전상경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문화 특성상 윗사람이 퇴근하지 않고 있으면 먼저 집에 들어간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초과 근무가 직원들의 창의성을 썩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육아휴직ㆍ유연근무제 등 가족친화적 제도를 적극 시행하고, 기업 간부들부터 야근, 회식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채지선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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