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생활전선에 내몰린 가족… 대화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입력
2015.06.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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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ㆍ양육ㆍ교육ㆍ노인 부양…

복지제도 부족해 '책임 과부하'

부모ㆍ자녀간 "공부해" "용돈 줘" 말만

'느슨하지만 친밀한 가족' 선호 1위

가족부담 극대화에 심한 거부감

“아버지에게 ‘맥주 한잔 하자’고 말해보라고요? 평소 식사할 때도 할 말이 없는데…. 못하겠습니다.” 서먹한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를 시도해보자는 한국일보의 가족 소통 실험 제안을 받은 직장인 조모(29)씨의 첫 마디였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말은 늘 잔소리나 훈계여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주변 친구들도 부모와 자주 대화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족의 소통 실험을 위해 만난 사람들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모ㆍ형제 중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가족이 한 명 이상 있었지만, 그 가족에게 “같이 외식하자” “같이 영화보자”는 말을 꺼내보라는 제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같은 집에 살며,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게 보내는 사람이 가족인데, 왜 우리는 서로 어색하고 서먹할까.

▦무거운 부양 의무…멀어지는 가족

전문가들은 가족 간 정서적 단절의 원인으로 ‘가족 기능 과부하’를 꼽는다. 가족이 너무 많은 역할을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대가족 시대에는 출산부터 양육, 교육, 노후 부양 등 태어나서 죽기까지 모든 과정을 가족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핵가족화와 경제 구조 변화 등으로 가족은 더 이상 이런 기능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됐고, 서구 복지국가들은 가족의 기능을 대신할 다양하고 치밀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 부양과 생활의 책임이 계속 가족에게 지워졌다. ‘선성장 후분배’라는 구호 아래 정부는 개인에 대한 사회안전망 구축에 소홀했고, 가족에게 규범적ㆍ제도적으로 이 역할을 맡겼다. 1970~80년대 맨몸으로 도시에 정착한 아버지들이 밤낮없이 일하며 처자식뿐 아니라 고향의 부모, 형편이 쪼들리는 형제들까지 먹여 살렸던 건 그래서다.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구조조정과 저성장 고착화로 대다수 국민들이 경제적 위기에 내몰렸지만, 정부는 그에 대한 수습을 복지제도가 아닌 가족에게 떠넘기면서 ‘가족의 피로’는 극에 달했다.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게 짐이 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결혼ㆍ출산 등 가족 구성을 회피했고 가족 간의 정서적 거리도 벌어졌다.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가족을 통해 압축적 근대성을 이뤄냈지만 그 결과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가족은 ‘생존하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정서적ㆍ경제적 공동체인 가족에서 경제적 역할만 남았고, 가족들은 모두 바빠졌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내몰리고 성인이 되면 살인적인 노동 강도의 직장생활에 시달리기 때문에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도 가족 생활을 할 수 없는 구조”라며 “가족이 함께 소통할 시간 자체가 없으니 가족끼리 서먹한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대상으로, 자녀는 부모를 경제적인 부양자로만 생각한다. 때문에 부모 자녀 간의 대화는 “공부해”와 “용돈 줘”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가족의 가치가 부각됐지만, 정서적 감정 교류 보다는 물질적 소비에 치우쳤다는 지적도 있다.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1970~80년대 ‘가족이 행복의 중심’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퍼져나갔지만 놀이공원에 가고, 외식을 하고, 바캉스를 떠나는 물질적인 소비가 행복한 가족의 상징이 됐다”며 “정작 가족끼리 깊은 마음으로 충분히 관계를 맺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국민들 “느슨하지만 친밀한 가족 원해”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은 어떤 가족을 꿈꿀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2년 20세 이상 국민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30년 가족 시나리오’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48.8%)가량이 ‘느슨하지만 친밀한 가족’을 선호했다. 이는 전문가들이 꼽은 최고의 가족 유형이기도 하다. 국가가 아동ㆍ노인에 대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가족 구성원 서로에 대한 부양 부담이 적은 대신 정서적 교류는 많아지는 형태다.

국민들이 두번째로 선호한 가족은 ‘평등사회-불평등 가족 공존 형태’(32.0%)다. 경제적 불평등이 적고 국가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에선 ‘느슨하지만 친밀한 가족’과 같지만, 여성의 가사ㆍ돌봄 역할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큰 형태다.

국민들이 거부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족부담 극대화 형태’다. 응답자의 41.9%가 ‘싫다’고 답한 이 가족 형태는 계층간 생활 수준 차이가 크고, 돌봄 기능이 가족에게 남아있으며, 개인보다는 가족이 우선시돼 모든 책임이 개별 가족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결국 국민들은 계층간 불평등이 완화되고 국가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며 개인의 생활이 존중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장혜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은 가족에 대한 의무가 너무 무거워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앞으로 사회와 정부가 양육, 부양 등의 의무를 나눠가져 가족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ankookilbo.com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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