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천고사설] 지배층의 의무를 찾습니다.

입력
2014.12.09 20:00

임진왜란 때 민심이 조선 왕조를 떠났던 데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와 공납제(貢納制)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종 36년(1541) 반포한 군적수포제는 15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 장정들이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1년에 2필의 군포를 내게 했던 제도였다. 문제는 병역세, 즉 군포(軍布) 징수 대상에서 양반 사대부들이 면제되었다는 점이다. 양반 지주들은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고 가난한 양민들만 병역 의무에 신음하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ㆍ1538~1593)이 임진왜란 발생 10년 전인 선조 16년(1583) 황해도 어사로 나가서 병역 및 공납 실태를 조사한 후 ‘황해도 순무(巡撫)할 때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런 폐단들을 적나라하게 열거했다. ‘일족(一族)에게 징수하는 폐단’에 대한 비판인데 군역의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이 도망가면 그 세금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대신 씌운다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한 사람이 군역을 못 견뎌 도망가면 그 역은 구족(九族)에게 미치고, 구족도 내지 못하면 인보(隣保ㆍ이웃)에게 미치고, 인보들도 내지 못하면 마침내 일족은 다 죽고 마을은 빈 터가 될 뿐입니다”라면서 민생 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한 백성이 군역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면 그 세금을 구족(九族)에게 전가시키고, 구족도 도망가면 이웃에게 전가시켜서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 도망가면 온 마을이 텅 빈다는 이야기였다.

공납은 그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가 전체 조세 수입의 60%에 이를 정도의 세원(稅源)으로 변질되었다. 공납의 문제도 여럿이었지만 가장 큰 폐단은 빈부 격차를 따지지 않고 같은 액수의 세금을 부과하는 형평의 문제였다. ‘하루 종일 걸어도 남의 땅 밟지 않는’ 대지주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소작인이나 같은 액수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부과 단위가 빈부가 아니라 가호(家戶)였기 때문에 부자나 빈자나 모두 한 가호로 쳐서 똑같이 부과했던 것이다. 지주에게는 헐하지만 소작농에게는 과중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공납 부과의 기준을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작미법(作米法), 대동법(大同法)이라고 하는데,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서 율곡 이이(李珥) 같은 개혁정치가들이 주장했던 세법이었다. 그러나 조정에는 양반 지주들을 옹호하는 벼슬아치들만 가득 차 있어서 이 법이 안건으로 올라오면 일제히 입을 맞춰 반대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일은 “신이 이 도에 와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에 대해서 들었는데 대동법으로 부역을 면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라면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다. 김성일은 이처럼 군역과 공납의 폐단을 개선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제시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좌천이었다. 김성일은 혜산첨사(惠山僉使) 김수(金璲)가 변장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천거해서 경원(慶源)가 되게 했는데, 여진족 니탕개의 침략으로 경원이 일시 함락되자 그 책임을 김성일에게 돌린 것이었다. 선조는 경원이 일시 함락되었다가 곧 수복된 것을 “나라의 형세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과장하면서, “그 원인을 따지자면 김성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그런 사람을 다시 시종(侍從)으로 삼을 수 없다”면서 나주목사로 좌천시켰다. 군역과 공납 폐단 해소를 진언한 상소에 대한 선조의 응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온갖 특권은 다 누리면서도 일체의 의무는 지지 않는 양반 사대부들의 나라를 백성들이 버린 것은 당연했다. 백성들은 도주하거나 심지어 일본군에 가담하는 것으로 체제에 저항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개성에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5년 5월 4일)라고 두려움 속에서 물어야 했다. 이런 민심이반은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서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하고 작미법을 실시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우리 사회 지배층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문회만 열리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병역기피,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등은 일그러진 한국 사회 지배층의 민낯을 잘 보여준다. 최근 한 항공사 오너의 딸인 부사장이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비행기를 되돌리고 사무장을 내리게 한 사건을 외신들이 ‘땅콩 회항 사건(Nut incident)’이라고 보도하고 있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는 원정 출산 논란까지 있었다니 온갖 특혜는 다 누리면서 자식은 다른 나라 국적을 갖게 하고 싶어 하는 실종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현재 같이 불합리한 부와 권력의 대물림을 끊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대한 사회적 공론이 일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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