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지금, 사회성 짙은 소설 양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입력
2014.10.28 17:23

단편소설에 집중해 작품활동 15년

깜짝 놀랄 이야기에 매달렸지만 이제는 인물과 오랜 시간 교감하며

장편 쓰는 쾌감을 알게 돼

책상 앞에서만 소설가인 것은 비극, 이야기꾼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 같다

“이제 그만 떠나 보내라는 뜻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수상 소감이 회한처럼 들렸다. 24일 전남 순천에서 만난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이기호씨는 ‘차남들의 세계사’의 주인공 ‘나복만’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소설 속 평범한 택시기사였던 나복만은 1980년대 군사정권의 빨갱이 색출 광풍에 휘말려 30년이 넘게 쫓기는 신세다. “그렇게 수배자로 만들어 버리고 나는 빠져 나왔으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요. 다음 작품을 써야 하는데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계속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뭐하고 있을까’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는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은 뒤 혼자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고 했다. 그리고 이 수상을 이제 그만 나복만을 놓아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올해는 이기호 작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꼭 15년이 되는 해다. 1999년 단편소설 ‘버니’를 시작으로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김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 등을 펴냈다. 발표작들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 이기호의 문학적 성취는 주로 단편에 집중돼 왔다.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써 내려가는 황당한 이야기들. 그러나 인물들의 선택은 필연적이고, 상황의 개연성은 놀랍도록 철저해 독자는 좀처럼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여기에 폭죽처럼 쉴 새 없이 터지는 재치와 풍자의 향연은 ‘이기호 식’이라는 단어가 한국 문단에서 고유명사로 통용되기에 부족함이 없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차남들의 세계사’는 일종의 분기점이다. 2009년부터 5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집필을 끌어오면서 소설과 문학, 한국 사회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변화를 거듭했다.

“소설이 쓰여진 지난 5년은 제 작품관이 한창 바뀌던 때입니다. 그래서 1부와 2부의 톤이 많이 달라요. 1부가 예전 제 소설의 전형이었다면 2부는 바뀐 저를 대변할 겁니다.” 그는 예전의 자신은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쓰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인물들의 내면은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번 소설을 쓰면서 인물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가는지가 이야기의 흐름보다 우선하게 된 거죠.”

생각이 바뀐 근원에는 사회적 대형 사건들이 가로 놓여 있다. ‘차남들의 세계사’를 쓰기 시작한 2009년 용산참사가, 이 소설을 마친 올해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사람의 목숨이 보상금과 보험금으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떠오른 하나의 질문은 끈질기게 작가를 괴롭혔다.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여도 되는가.’

이야기가 사람 위에 존재하는 자신의 소설에서 그는 어떤 회의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차남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안기부 요원들은 나복만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인과관계와 플롯과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사람을 짓밟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 자신을 발견한 듯 그는 화들짝 놀라며 이야기를 중단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래서…그래서…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다음 스토리를 어서 빨리 듣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음 단락은 듣지 말고 그대로 넘어가길…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를 이해하는 덴 아무런 지장도 없을 테니까.” 이 어색한 대목은 소설의 일부인 동시에 소설가 이기호의 ‘전향’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럼 앞으로 ‘이야기꾼’ 이기호는 볼 수 없는 것일까.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답했다. “사회참여적 작가라는 거창한 단어를 끌어오지 않아도 그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책상 앞에서만 소설가인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 소설 외에도 한국의 과거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조명하려는 시도가 올해 꽤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사회성 짙은 소설들을 대거 양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주제의 편협함에 대한 우려가 생기는 한편, 아직 문학이 죽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듭니다.”

그는 당분간 장편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절묘하게 잡아채는 단편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제는 인물과 오랜 시간 교감하며 인물의 행보를 뒤에서 지켜보는 장편의 쾌감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는 집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새벽 3시 이전에는 자지 않는다는 원칙을 10년째 고수하고 있다. “끄적거리는 시간이 있어야 뭔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학생들에게도 시간을 정해 놓고 쓰라고 늘 얘기합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좋은 소설의 요건은 의외로 기상천외한 발상 같은 것들이 아닌, 정확한 문장과 정서의 통념을 벗어난 인과 만들기다.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일들이 더 이상 존재할까요? 비슷한 사건을 두고 작가가 어느 정도 차별화된 동기를 만들어내느냐가 좋은 소설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태양이 뜨거워서 살인을 저지르는, 그런 류의 소설들을 사랑합니다. 이기호라는 사람이 재담꾼보다는 저만의 인과를 창출하려고 노력하는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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