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중 미국군인노조 결성, 종전에 크게 기여

입력
2014.10.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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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웅변가 동료 사병 선동, 두차례 군사법정서 불명예 제대

두 번째 재판서 이겨 명예 회복

반전ㆍ지휘관 직접 선거 등 강령, 소식지서 부당한 명령ㆍ처우 폭로

회원 1만명 뜨거운 반향 일으켜

종전 이후 노조 운동 동력 상실, 대외활동 접고 학교서 역사 가르쳐

졸업식 대표 연설자로 단골 추천

2013년 1월 국제노동자당 주최 포럼에서 미국군인노조(ASU)의 활약을 설명하는 앤디 스태프. 그의 활약은 군대민주화 운동의 한 정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ㆍYouTube 동영상 화면
2013년 1월 국제노동자당 주최 포럼에서 미국군인노조(ASU)의 활약을 설명하는 앤디 스태프. 그의 활약은 군대민주화 운동의 한 정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ㆍYouTube 동영상 화면

만일 군대에 노조가 생긴다면? 임금과 근무시간 복지 수준을 놓고 매년 정부와 협상을 벌인다면? 부당한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휘관을 직선으로 뽑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대를 없애자는 말만큼이나 급진적인 저 생각이 실제로 실현된 적이 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구정대공세(1968.1.30) 직전인 67년 12월 미국 뉴욕에서였다. 그 해 베트남에는 약 50만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었고, 대통령 린든 존슨이 의회를 상대로 추가 파병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던 때였다. ‘미국군인노조(American Servicemen’s UnionㆍASU)’라는 이름의 그 조직은 반전 및 군대민주화를 기치로 병영 안팎에서 꽤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60,70년대 좌파 운동과 결합하면서 베트남전쟁 종전에 크게 기여했다. ASU를 설립하고 이끈 앤드루 딘 스태프(Andrew Dean Stapp, 줄여서 앤디 스태프)가 9월 3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1964년 통킹만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베트남 내전에 본격 개입하기 전부터 사실 그 전쟁의 인기는 높지 않았다. 59년 국제노동자당(WWP)을 창당한 사회주의자 샘 마시(Sam Marcy, 98년 작고) 등이 60년초부터 대중 집회에서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의 제국주의적 의미와 계급적 성격을 끊임없이 폭로했고, 진보적인 젊은 세대의 호응도 컸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쟁에 징집된 전투병의 80%가 블루 칼라 출신이었다. 대학생은 전체의 20%로 당시 대학진학률(약 50%)에 턱없이 못 미쳤고, 또 대부분 장교였다. 70년대 하버드대 재학생 가운데 베트남에 파병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파병이 시작되고 전쟁이 확산되면서 시민들은 그 전쟁의 계급ㆍ계층적 편향성을 분위기로 체감하게 됐고, 1년 단위로 교대하던 전선의 군인들과 제대병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 전쟁이 정부가 선전하듯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베트남 주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누가 적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모른 채 총을 쏘아야 하는 현실, 또 전장의 병사들에게 전황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

로빈 윌리엄스(2014년 8월 작고)가 주연한 배리 레빈슨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 후반부에는, 군인방송 DJ인 윌리엄스가 나트랑 전선에 투입되는 군인들에게 선사한다며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네이팜 탄에 불타는 마을과 엄마의 시신 곁에서 통곡하는 아이, 피에 젖은 슬리퍼 장면들 뒤로 흐르는 저 감미로운 노래의 극명한 대비는 전쟁영화답지 않게 달막거리는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묵직하게 눌러준다. 저 영화 속 장면의 시간 배경이 1965년이었다. 스태프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언제나 미군이 베트남 국민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68년경에는 모든 게 거짓임이 명백해졌다.” 미군 대위 호워드 레비가 양민 학살자라며 그린베레 병사들의 교육을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된 건 67년이었다.(64년 미국 대법원의 흑인참정권 판결을 이끌어낸 앨러배마의 인권 변호사 찰스 모건 주니어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앤디 스태프가 미 육군에 입대한 것도 그 해 봄이었다.

스태프는 1944년 3월 25일 필라델피아의 한 의무대 미혼 간호사에게서 태어나 곧장 고아원에 보내졌다. 1살 무렵 평범한 엔지니어 가정에 입양됐고, 63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 진학할 무렵까지도 도드라진 사연은 없다. 스태프는 역사, 특히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를 익히면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썼다.(2014.9.17) 스태프는 70년 발간한 자서전 에 그 배경의 일부를 밝혔다. 고교 졸업 직후 한 고고학 발굴팀과 함께 이집트를 갔다가 식민주의의 끔찍한 유산, 즉 위대한 고대 문명을 이룩한 후손들이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어떤 가난과 굴욕을 강요당하게 됐는지 보게 됐다는 것이다.(workers.org, ‘Andy Stapp, a thorn in the Pentagon’s side’)

하지만 누구라도 당시 대학가, 특히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의 진보적 기운의 세례를 입지 않기란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캠퍼스의 반전 분위기는 뜨거웠다. 연일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고, 수많은 청년들이 징집을 피해 캐나다나 유럽으로 도피했다. 심지어 남베트남 게릴라(베트콩)가 되겠다고 짐을 싸는 이들도 없지 있었다. 스태프 역시 65년 10월 자신의 영장을 태워 없앤다.

조너선 닐의 저서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따르면, 65년 봄 미국 100개 이상의 대학에서 반전 토론회가 열렸고, 좌파 전국 대학생조직인 민주학생연합(SDS)가 주도한 워싱턴 반전 시위에는 2만5,000명의 학생이 모였다. 67년 4월 15일 뉴욕 반전행진에는 참가자가 무려 30만 명이었다. 흑인인권운동도 반전운동과 결합했다. 군대 내 흑인 차별과 아시아 인종에 대한 차별도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67년 4월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 연설에서 “(흑인들은) 전체 인구를 구성하는 다른 인종에 비해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높은 비율로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미국 남서부와 조지아주, 이스트할렘에서는 맛본 적이 없는 자유를 동남아시아에 가져다 주기 위해서 말이다”라고 말했다.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징집을 거부, 챔피언 벨트와 프로복서 자격을 박탈당한 것도 그 해였다. 대표적 급진주의 학생운동단체였던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회장으로 68년 극좌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을 이끈 스토클리 카마이클(98년 작고)은 베트남 전쟁을 “백인이 홍인종(아메리카 원주민)한테서 훔친 땅을 지키기 위해 흑인을 보내 황인종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성토하기도 했다.(책 177~179쪽)

스태프는 징집거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자원 입대를 결심한다. 그리고 67년 오클라호마의 ‘포트 실’ 훈련소에 입대한다. 그는 어떤 배후도 곁도 없는, 혼자였다.

1965년 3월 노동자들과 미시간대 학생들이 연대한 반전 거리행진. "부자들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저 선언은 미국 시민들 상당수가 전쟁 초기부터 베트남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회주의 이념과 인종 여성 인권운동이 결합한 반전 운동은 73년 베트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ㆍhttp://www.lpusd.k12.ca.us에서
1965년 3월 노동자들과 미시간대 학생들이 연대한 반전 거리행진. "부자들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저 선언은 미국 시민들 상당수가 전쟁 초기부터 베트남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회주의 이념과 인종 여성 인권운동이 결합한 반전 운동은 73년 베트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ㆍhttp://www.lpusd.k12.ca.us에서

스태프는 탁월한 웅변가였고, 유머러스한 재담꾼이었다고 한다. 병영에서 그는 베트남전쟁의 실체와 반전 운동의 필요성, 군대의 비인격ㆍ반인권 관행들을 이야기하며 사병들을 선동한다. 자서전의 한 대목이다. “곧 막사 사병 거의 전원이 나의 관점을 공유하게 됐고, 적대감을 보인 이는 극소수였다. 소등한 뒤 우리는 전쟁을 조롱하곤 했다. (…) 린든 존슨을 기막히게 성대모사하던 한 병사와 모의 기자회견을 한 게 기억난다. ‘(문) 미스터 프레지던트, 베트남에 추가 파병할 계획이십니까?’ ‘(답) 나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달성할 때까지 너희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며 싸울 것이다.’ ‘(문) 포트 실 장병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그 가시 같은 사회주의자 놈들.’”

스태프는 두 차례 군사법정에 선다. 한 번은 반전 팸플릿과 사회주의 서적들이 든 사물함 개방 명령을 거부해서, 또 한 번은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기고 병영을 벗어난 게 적발돼서였다. 처음 재판에서는 45일 강제노역형을 받지만, 두 번째 재판에서는 동료 장병들의 우호적인 증언과 사회주의 인권단체(Youth Against War and Fascism) 활동가들의 법률적 도움으로 승리한다. 그에게 동지와 조직이 생긴 거였다. 뉴욕타임즈는 68년 ‘에스콰이어’ 지에 실린 당시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놀라운 점은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밝힌 스태프에게 동료 병사 누구도 린치를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인들은 공산주의자를 죽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태프를 좋아했다. 그가 두 번째 재판에서 승리했을 때 그들은 환호했다.” 잡지의 PX(post Exchange) 판매는 당연히 금지됐다

미 육군은 이듬해 봄 스태프를 이등병(Private E-1)으로 불명예제대 시키지만 그는 소송을 걸어 전역 사유를 명예제대로 바꾼다.

그가 ASU를 결성할 당시의 미국 사회와 군대 분위기가 그러했다. ASU는 노조소식지 ‘더 본드(The Bond)’를 만들어 배포하며 조합원 모집에 나선다. ASU의 강령은 군인 복지를 비롯해서 반전과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청산, 베트남 참전과 같은 불법적 명령 거부, 지휘관 직접 선거 등이었다. 그는 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여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규탄하는 시위의 진압 명령에 불응한 장병(텍사스 포트 후드)들의 군사재판에 개입해 변호했고, 69년 뉴저지 포트 딕스의 영창 소요사태 재판에서도 군대의 부당한 처우를 적극적으로 폭로했다. ‘더 본드’는 매달 수천 부씩 전국 군부대 회원들에게 발송됐고, 육해공군의 막사와 참호에서 돌려가며 읽혔다. 1980년 미국 대선에 국제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해 1만3,000여표를 얻는 데이드레 그리스월드(당시 WWP 활동가)는 당시 어떤 부대 우편실 담당자는 전 부대원의 이름으로 구독신청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worker’s world.org) 스태프와 그리스월드는 67년 10월 결혼해 딸 캐서린을 낳은 뒤 얼마 안 가 이혼한다.

70년대 초 ASU 회원은 1만 명에 육박했다. 반대로 베트남 전황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위험한 수색정찰 임무에 사병들을 내모는 호전적인 장교나 하사관들은 사병들의 ‘프래깅(Fragging)’ 즉 숙소에 수류탄 안전핀을 놓아두는 등의 위협ㆍ살상 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미 국방부가 공식 집계한 프레깅은 67~70년 사이 563차례였고, 그 중 363건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미국의 베트남전쟁 228쪽) 고발ㆍ적발되지 않은 사례는 훨씬 많았고, 실제로 사병들이 장교를 살해한 예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신병 훈련소가 있던 타코마의 포트 루이스 기지 인근에는 군인들을 위한 ‘셀트 하프(Shelter Half)’같은 커피숍이 개설돼 다양한 회합과 유인물 인쇄, 조직화 사업의 거점으로 활용됐다. 군인과 대학생, 시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한 ‘군민평화연대(GI-Civilian Alliance for Peace,68-69)의 ‘카운트포인트(Counterpoint)’ 등 반전 신문만도 전국적으로 약 300종에 달했다.

이들 신문에는 부대 소식과 전황, 반전 이데올로기 외에도 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권익, 미국 외교정책 비판, 주둔지 주변 지주와 사업자들 가운데 폭리를 취하는 이들을 고발하는 기사 등이 실렸다. ASU 기관지 ‘더 본드’는 매달 한 가운데 지면을 사병들이 선정한 부대 내 가장 악질적인 장교나 하사관을 소개하는 ‘이달의 돼지(Pig of the Month’로 장식,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워커스 월드는 “전성기 더 본드의 구독자는 7만5,000명에 달했고, 미군이 주둔한 곳 어디에나 통신원이 있었다”고 밝혔다.

71년 미 육군 로버트 하이널 대령은 관변잡지 ‘Armed Forces Journal’에 “사기와 규율 전투태세 등 면에서 미군은, 몇몇 모범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난 1세기를 통틀어 가장 열악한 상태이며 어쩌면 미국 역사상 최악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의 지적은 전혀 엄살이 아니었다. 훗날 스태프는 “군인노조를 합법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우리의 노력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틀림 없다”고 말했다.

조너선 닐은 미국의 부자와 권력자들이 60년대 말부터 서서히 베트남 철군을 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저항운동이 그들의 국내 지배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베트남 권력보다 국내 권력이 훨씬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미국 정부는 소련에 대한 자존심과 서방의 외교적 영향력을 잃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출구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70년 이후 전쟁 양상도 점점 공군과 해군 중심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전쟁이 끝난다. 주요 반전운동 활동가로 파악된 장병들을 수시로 전출 보내는 등 군의 방해에도 꿋꿋이 버티던 ASU의 활동과 군대 민주화운동은 종전과 함께 급격히 동력을 잃게 된다.

스태프는 워커스 월드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WWP에 입당해 강연을 다녔다.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 대외 활동을 접고 뉴저지의 한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일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졸업식 대표 연설자로 학생들의 추천을 받곤 했다고 그리스월드는 회고했다. 그리스월드는 워커스월드에 올린 스태프의 부고 글에서 “나는 아직도 앤디의 ASU 회원증을 가지고 있다. 거기엔 노조의 강령과 함께 이런 슬로건- 남녀 사병의 권리 장전’을 획득하기 위하여-이 적혀 있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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