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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장, 음반 기획자, 대학 강사, 방송 진행자…. 다채로운 경력만큼이나 본업을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 길게 길러 묶은 꽁지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은 로커 같다.

국악에 ‘환장한 환자’를 자처하는 노재명 씨(36)의 현업은 국악음반박물관장인데 전국의 소리꾼들이 인정하는 국악 전문가이다. 그의 국악 사랑은 올해로 꼭 20년째. 고교 2학년 때인 1986년 팝송, 재즈 음반 등을 사러 서울 청계천을 누비다가 우연히 명창 임방울의 쑥대머리 음반을 발견하고 싼 맛에 100원을 주고 샀다. “처음 듣고선 벼락을 맞은 듯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임방울의 수궁가 테이프를 사서 3년 내내 들었더니 귀가 절로 트이더군요.” 이어 이동백 박기홍 김창룡 등 조선말 5대 명창의 소리를 접하고 나서 더욱 국악에 환장하게 됐다. 오죽하면 꿈에서도 명창들을 만나 소리를 청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판소리를 흥얼거렸을까.

대학은 재수 끝에 전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국악을 하다간 굶어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비겁했지요.” 대학 시절에도 녹음기를 들고 소리꾼들을 찾아 다니다가 낙제할 위기에 몰렸지만 직접 녹음한 명창들의 테이프를 들고 교수들을 찾아가 읍소한 끝에 간신히 졸업장을 따냈다.

졸업 후 음반 회사에서 1년 정도 일을 배우고 독립해 국악 전문 기획사 ‘명인기획’을 차려 270여 종의 국악 음반을 기획했다. 이 무렵 기획한 일본 빅터 유성기 원반 시리즈(서울음반)와 일본 컬럼비아 유성기 원반 시리즈(LG미디어)는 스스로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다. 20여 편의 국악 논문과 ‘판소리 음반 걸작선’ 등 책도 13권이나 써냈다. 국악 발전을 위해 분투하는 아들을 위해 교사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는 노후용으로 마련해 둔 경기 양평의 땅을 박물관 터로 선뜻 내주었다.

국악음반박물관은 20년 동안 자료를 모으면서 느낀 답답함을 푸는 산물로 태어났다. 2001년 양평 북한강변에 7억을 들여 지은 박물관은 국악 음반, 명창들의 육성 및 공연 실황 녹음, 악기, 사진, 문헌 등 3만5,000여 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누구나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90년대 초 가수 신중현씨와 함께 전통 산조 가락을 연구한 끝에‘전기기타 산조’라는 한국적 록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조만간 한 달에 한 번씩‘적벽가 연속 감상회’를 마련할 계획이다. “옛 선비들의 풍류를 되살려 볼 작정입니다. 휘영청 달 밝은 한옥 마당에 한복을 차려 입은 귀명창(국악 애호가)들을 모셔놓고 판소리의 풍류를 되살려 볼 생각입니다.” 노 관장은 한여름 듣기 좋은 곡으로 느릿한 진양조 가락을 추천한다. “무더운 여름날 춘향가 중 이도령이 광한루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는 ‘적성가’ 대목이나 이도령과 춘향이가 사랑을 나누는 ‘긴 사랑가’ 대목을 들어보세요. 일상의 걱정과 시름, 더위까지 잊으실 겁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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