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日소도시에 쫙 깔린 한국 화장품···동네 약국 점원도 로무안도, 티루티루 말했다[K뷰티, 지구촌 매혹하다②]

입력
2025.01.09 04:30
12면
[K뷰티, 지구촌 매혹하다]
<2>‘30년 아성’ 샤넬∙랑콤 제쳤다-일본
한국 화장품, 일본서 수입액 1위
"품질 좋은데, 가격 합리적" 평가
대도시 넘어 日 구석구석 침투
다만 '전국구' K브랜드는 극소수
"연령·카테고리 등 영역 넓혀야"


일본 도쿄 인근 지바(千葉)현 기미쓰(君津)시에 사는 노리코 니야마(29)는 얼마 전 동네 드러그스토어(약국) '마쓰모토기요시'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화장품 코너의 30%가량을 한국 제품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기미쓰시는 8만여 명이 사는 작은 도시다. 최신 유행에 민감한 일본인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도 아니다. 지역 드러그스토어는 평범한 여중·여고생이나 젊은 주부들이 화장품 사러 오는 '찐(진짜)' 로컬 공간이라는 의미다. 니야마는 "K뷰티가 마니아층을 넘어 평범한 일본인의 삶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니야마가 한국 화장품을 처음 알게 된 2010년대 초반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때도 동방신기나 소녀시대, 빅뱅 등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한국 화장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니야마도 주로 온라인을 통해 알음알음 구입했다. 당연히 고교 시절 주변에 한국 화장품을 쓰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대학 다닐 때도 친구에게 한국 화장품을 추천하면 "안전해?" 질문부터 돌아왔다. 그만큼 한국산 제품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았다.

반전의 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었다. 외출을 못 하는 젊은이들이 넷플릭스를 찾고 '사랑의 불시착' '오징어게임' 등 한국 드라마가 일본을 강타했다. 1020 사이에서 한국식 메이크업이 유행을 탔다. 니야마처럼 전자상거래(이커머스) 플랫폼 '큐텐재팬'에서 한국 화장품을 직구(직접구매)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한국 화장품이 '코스파(가성비)'가 좋다"는 입소문이 났다. 이렇게 일본에서 영역을 넓혀가던 K뷰티가 지역 소도시의 오프라인 채널까지 진출했다. 니야마는 "연령대에 따라 다르지만 가성비가 중요한 제 또래 일본 여성들은 한국 화장품을 정말 많이 쓴다"고 했다.




로무안도(롬앤), 티루티루(티르티르), 라네주(라네즈), 힌스···.


2024년 12월 5일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시에 있는 마쓰모토기요시 매장. 50대 일본인 직원은 이렇게 K브랜드 이름을 또박또박 읊으며 "젊은 친구들이 많이 사간다"고 했다. 이날 매장 입구부터 티르티르와 라네즈 제품이 깔려 있었다. 또 데이지크의 팔레트와 립 제품은 품절이거나 재고가 딱 한 개뿐이었다. 인근 버라이어티숍(잡화점) '로프트(LOFT)' 매장에선 라카(LAKA), 퓌(Fwee)의 립 제품 재고가 많지 않았다. 가와고에시는 도쿄 외곽에 있는 인구 35만 명 소도시다.



일본 소비재 시장은 자국 브랜드 선호, 폐쇄적 유통 구조 등의 이유로 한국 기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으로 여겨져 왔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대표 기업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본에서 한국 화장품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일부 '덕후(마니아)' 사이에서 반짝 유행하는 수준을 넘어 K뷰티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류 열풍에 뛰어난 품질, 합리적 가격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다만 K뷰티 인기가 특정 세대(1020)와 가격대(중저가), 일부 카테고리에 한정돼 있는 터라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본서 프랑스산 제친 K뷰티


일본에서 K뷰티 인기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8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1~9월 일본의 국가별 화장품 수입액은 한국이 1,022억 엔으로 가장 많았다. 전체 수입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4.7%로 프랑스(20.9%∙866억 엔)보다 약 4%포인트 높았다. 일본 수입 화장품 시장에서 30년 동안 독주한 프랑스를 2022년 처음 제친 이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하는 향수 등의 분야를 제외하고 순수 화장품(기초∙색조) 분야로 좁히면 한국 화장품 비중은 더 높아진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실제 지난달 2일 도쿄 최대 번화가인 시부야의 쇼핑몰 로프트의 화장품 코너는 국내 CJ올리브영 매장을 방불케 했다. 매장 가운데 원형 진열대에는 일본 3대 잡화점인 로프트가 '2024 베스트 화장품'으로 뽑은 기초 화장품이 깔려 있었는데 20여 개 브랜드 모두 K뷰티였다. 색조 화장품 코너 또한 22개 중 15개(68.1%)가 한국 브랜드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 도쿄 무역관 김보혜 차장은 "일본 화장품 채널 중 로프트가 트렌디한 제품을 가장 빠르게 배치한다"며 "그만큼 한국 화장품이 인기"라고 전했다.



사흘 뒤인 5일 도쿄 최대 한인타운 신오쿠보. 한글 간판이 빼곡한 200m 길이의 메인 거리에 한국 화장품 편집숍만 10여 곳에 달했다. 2019년 5개에 불과했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며 두 배 늘어났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오쿠보가 K화장품 쇼핑 성지가 됐다. 편집숍 '4YOUCOSME'의 점원은 "일본 잡화점이나 드러그스토어보다 K화장품 종류가 많다 보니 일본 젊은 층이 정말 많이 온다"며 "편집숍을 내고 싶은데 비는 점포가 없어 기다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날 신오쿠보역 인근 한 점포에서는 화장품 매장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화장품 브랜드 '미샤'의 강인규 일본 법인장은 "일본 오프라인 채널 바이어들이 다달이 한국에 와서 어떤 제품이 잘나가는지 살피고 갈 정도"라고 했다. 화장품 연구∙개발∙생산(ODM) 회사인 코스맥스의 어재선 일본 법인장은 "일본 브랜드 10개 중 8개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스타일의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며 "그래야 일본 젊은이에게 잘 팔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화장품 '코스파'가 좋다


K뷰티 열풍은 한류와 함께 일본의 사회·경제적 변화, 한국 화장품의 경쟁력 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결과다. 일본에선 몇 년 전부터 계속된 엔저와 고물가 등으로 가계 실질 소득이 줄어들어 '가성비' 화장품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었다. 일본 제품보다 10~20% 저렴한 한국 화장품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여기에 코로나19 때 넷플릭스·유튜브 등을 통해 K콘텐츠를 접하며 한국식 메이크업에 빠진 일본 Z세대(1020)는 '메이드 인 코리아' 화장품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에게 한국은 원래 '힙'하고 잘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화장품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인기를 끈 건 아니다. 핵심은 품질. 먼저 시카(병풀추출물)·비타C 같은 화장품 성분부터 획기적이었다. 코로나19 때 마스크를 쓰느라 피부 트러블을 겪던 일본 여성들이 피부 진정 효과가 있는 시카 성분에 열광하면서 브이티(VT)의 마스크팩, 크림 제품이 품귀 현상을 빚은 게 대표적이다. 또 쿠션이나 립 틴트, 마스크팩처럼 K뷰티가 개척한 카테고리에선 제품력이 독보적이었다. 티르티르 쿠션은 덥고 습한 일본에서 "피부에 강하게 밀착돼 메이크업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나며 국민 쿠션이 됐다.



한국 브랜드가 이렇게 좋은 화장품을 합리적 가격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세계 최고 ODM 생태계 덕분이다. 인디 브랜드의 좋은 아이디어를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이 고품질의 화장품으로 만들어주기 때문. 게다가 의뢰 시점으로부터 3~6개월이면 제품이 나온다. 이에 한국 인디 브랜드들은 갈수록 세분화하는 소비자 니즈를 발 빠르게 포착해 수시로 신제품을 출시하고 고객 반응을 반영해 후속 제품을 내놓는 식으로 일본을 공략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브랜드는 1년에 한 번 신제품을 내놓았다. 트렌드가 자주 바뀌는 색조 분야에선 치명적 약점이었다. 기성 브랜드는 책임 회피 문화, 까다로운 품질 기준 등의 이유로 빠른 변화에 보수적이었다. 가령 상품 개발팀이 시장 흐름에 발맞춰 립스틱 제형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하면 '1m 높이에서 떨어뜨렸을 때 립이 변형되면 안 된다'는 내부 기준을 넘지 못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인디 브랜드가 치고 올라오기도 어려웠다. 소량이더라도 인플루언서와 연예인 등 아이디어를 빠르게 제품화해 줄 ODM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제품 생산에 성공해도 백화점·드러그스토어 등 오프라인 중심 유통 구조는 신규 브랜드에 큰 장벽이었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일본 색조 시장은 '데파코스(백화점 입점 고급 브랜드)'와 저가 브랜드 사이에 적절한 품질과 가격, 트렌디함을 갖춘 중가(中價) 브랜드가 많지 않다"며 "유행과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일본 Z세대의 수요가 높은 이 영역을 한국 브랜드가 잘 파고들었다"고 했다.


J뷰티의 역습


문제는 앞으로다. 일본 브랜드가 K뷰티의 강점을 빠르게 벤치마킹하고 있다. 일본 A브랜드는 2023년 말 코스맥스에 립 틴트 생산을 맡기며 한국 화장품처럼 선명한 발색과 촉촉한 광택, 트렌디한 디자인 등을 구현해달라고 요청했다. 2024년 하반기 출시된 이 제품은 3, 4개월 만에 100만 개 넘게 팔렸다. 화장품을 자체 생산하던 일본 브랜드들이 국내 화장품 ODM 업체에 생산을 맡기는 식으로 K뷰티의 강점을 빨아들이고 있다.

K뷰티를 표방하는 일본 브랜드도 있다. K팝 아이돌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원정요씨와 일본 화장품 유통업체 레인메이커스가 합작해 만든 'Wonjungyo'다.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모모와 전문가 원씨를 앞세워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일본서 브랜드를 론칭한 지 2년밖에 안 됐지만 매출 1,000억 원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점, 벤더사를 통해 오프라인 매장에 화장품을 공급하는 한국 브랜드와 달리 유통에서 잔뼈가 굵은 레인메이커스가 매장과 직거래하기 때문에 핵심 매대 확보나 프로모션 등의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고 한다.



일본에 진출한 중국 화장품 브랜드 'C뷰티'의 공세도 무시할 수 없다. 퍼펙트다이어리, 인투유 등 색조 브랜드는 저렴한 가격과 화려한 디자인 등을 앞세워 일본 온·오프라인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다. 이들 제품 또한 한국 ODM 업체가 생산하고 있어 품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에 과거 매장 한편에 한국 브랜드를 따로 모아 'K코스메' 공간을 만들던 일본 오프라인 채널들이 요즘에는 K뷰티와 J뷰티, C뷰티를 한데 모아 '아시아 코스메'로 재편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브랜드는 일본에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최근 연어에서 추출한 PDRN(폴리데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 성분을 넣은 한국 화장품이 현지에서 인기를 얻자 다른 브랜드에서 '미투 제품(모방제품)'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보통 2주 단위로 임차하는 화장품 매장의 프로모션 판매대를 한국 브랜드가 쓰지 못하도록 6개월 장기 계약하는 식으로 '경쟁사 죽이기' 전략을 펼치는 브랜드도 있다고 한다. 한국 브랜드만 잡으면 일본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발동하고 있는 셈. 여기에 엔저 장기화에 따라 일본에서 한국 화장품 가격대도 올라가는 추세다.


아직 이른 축배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 화장품·의약품 분야의 전자상거래화 비율은 8.24%. 일본 소비자 90% 이상은 오프라인에서 화장품을 산다는 의미다.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브랜드는 ①큐텐재팬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인지도를 쌓은 후 ②대도시 잡화점(로프트·플라자 등)에 진출하고 ③여기서 성과가 나면 일본 전역에 있는 드러그스토어에 입점하는 수순을 밟는다. 현재 ③단계까지 판매망을 확장해 전국적으로 매출을 내고 있는 한국 브랜드는 손에 꼽는 수준이다. 이들 브랜드 또한 일본 매출 규모가 1,000억 원대 수준으로 알려졌다.

어재선 법인장은 "일본 지방에 내려가면 카탈로그 형태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업체들이 있는데 매출 2,000억 원 넘는 곳이 수두룩하다"며 "일본 화장품 시장에서 K뷰티는 일부만 차지한 것이니 자만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최대 화장품 리뷰 플랫폼 '아토코스메'의 한국 자회사 글로우데이즈의 공준식 대표는 한국 화장품의 지금 위치를 "특정 채널(온라인) 및 계층(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여성), 일부 카테고리(마스크팩·에센스·쿠션·립 등)에서의 인기"라며 "오프라인 장악력을 높이며 고객층을 계속 넓혀 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여러 소비자 성향이 보수적이고 유통 구조가 복잡한 일본 화장품 시장 특성을 이해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K뷰티가 단명(短命)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도쿄 기미쓰 가와고에 박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