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한 K팝 팬덤이 탄핵 집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촛불의 자리를 대신한 K팝 가수 응원봉은 전 세대로 퍼지며 탄핵 집회의 상징이 됐고, K팝 노래들은 정치적 집회를 민주주의 축제의 현장으로 바꾸었다. 여기에는 K팝 팬덤의 특징인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문화, 자발적인 연대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7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에 모인 인파는 27만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20대 여성이 18.9%로 가장 많았고, 50대 남성(13.9%), 30대 여성(10.6%)이 그 뒤를 이었다. 20대 여성이 대규모 정치 집회의 중심이 된 건 이번만이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도 2030 세대 여성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며 목소리를 키워 왔다.
20대 여성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이들이 12∙3 불법 계엄 사태 이후 열린 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K팝 팬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공유하기 시작했고, 촛불 대신 비∙바람에 꺼지지 않는 응원봉을 꺼내 들고 여의도로 향했으며, 집회 참여 경험이 있는 이들은 국회의사당 인근 화장실 위치 등 주요 정보를 전하며 초보 참가자들을 도왔다. 20대 여성들이 집회 성격을 바꿔놓은 결과 지난 14일 집회에는 어린아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한 세대가 뒤섞이는 말 그대로 문화 축제가 됐다.
시작은 엑스(X·구 트위터), 더쿠 등 온라인 팬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공유된 집회 참여 글과 사진이었다. 그룹 플레이브 팬인 대학생 방소희(23)씨는 “NCT 응원봉이 찍힌 기사 사진이 X에서 많이 공유됐는데 그걸 보고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며 “나도 집회에 나가겠다고 하니 응원도 많이 받았고 자신도 나가겠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했다. 13일 여의도 집회 현장에서 만난 김소은(가명∙28)씨도 “집회라면 무서운 느낌이 약간 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응원봉을 들고 나오니 친구와 함께 용기를 내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취향을 공유하는 낯선 이들과 서슴없이 친분을 나누는 K팝 팬덤 문화는 고스란히 집회 현장에 이식됐다. NCT 팬인 조윤희(가명∙38)씨는 “옆에 있는 사람과 직접 만든 굿즈나 간식 등을 나누는 걸 ‘소매넣기’라고 하는데 K팝 팬들에겐 무척 익숙한 문화”라며 “저도 소매넣기 하려고 응원봉 든 분과 나누려고 간식을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K팝 팬덤은 사회적 멸시 속에서도 거대한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기획사 관리 체제로 바뀌면서 수직적 조직을 이뤘던 팬클럽은 사라졌고 팬들은 수평적 연대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는 스밍총공(음원 순위를 높이기 위해 팬들이 스트리밍 회수를 늘리는 것) 같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획사의 부당한 처우나 가수의 도덕∙윤리적 잘못에 항의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3일 여의도 집회 현장에서 만난 20대 직장인 이민진씨는 “아티스트를 위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K팝 팬덤의 결속력이 이번 집회에도 이어진 것 같다”면서 “아티스트에 관련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이듯 이렇게 사회에 참여하며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팬덤은 독특한 형태의 시민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대규모 집단이지만 집중된 권력이 없으며,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행동할 때도 수평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진다. 자발적 참여를 강조하고 연대를 중요시하는 문화, 아티스트를 통한 선한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 같은 민주적인 공동체 경험이 20대 여성들을 집회 현장으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지영 한국외대 HK연구교수는 “과거엔 여성 팬덤을 ‘빠순이’라 부르고 비하하며 사회적으로 억압하기도 했지만 K팝 팬덤은 사회의 축소판으로 오히려 앞서가는 측면도 있다”면서 “집단 내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끊임없이 분산되고 이동하면서 ‘누구도 그 누구의 위에 있지 않다’는 수평적 인식이 내재돼 있는데 이런 점들이 20대 여성들의 집회 참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