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오르한 파무크 "대통령에 화난 한국인 존경해"

입력
2024.12.16 20:00
21면
정치 소설 '내 이름은 빨강' '페스트의 밤' 등
14년 치 그림일기 담은 '먼 산의 기억' 출간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의 75%가 대통령에게 화를 내고 있지요.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 상황을 일기에 썼을 겁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72)가 신간 출간을 계기로 진행된 서면 언론 인터뷰에서 12·3 불법 계엄 사태에 이렇게 밝혔다. 1960년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10년에 한 번꼴인 여섯 번의 쿠데타가 반복된 튀르키예에서 나고 자란 파무크는 문학을 통해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해온 작가다. 그는 "한국인 75%의 바람에 존경을 표한다"며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파무크는 인터뷰가 끝난 지 하루 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을 들었다.

튀르키예 비판한 파무크 "작가라면 고국 비판해야"

대표작 '눈'과 '페스트의 밤' '내 이름은 빨강' 등을 통해 튀르키예 역사를 주로 다뤘던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세속화된 민족주의 양극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튀르키예 정체성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적도 있다. 그럼에도 파무크는 "튀르키예의 파시스트들이 일으키는 문제들"을 글을 통해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제3세계인이며 서구에 사는 작가들은 제 나라, 국민, 일상 문화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약간 용감할 수도 있겠지만 과장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저도 두려울 때가 있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많은 작가를 감옥에 넣었는데, 아마도 노벨상이 나를 보호해주는 것도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노벨상' 파무크의 '14년 치 그림일기'

이번에 출간된 자전적 에세이집 '먼 산의 기억'에서는 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기록광'인 파무크의 호주머니에는 항상 몰스킨 수첩이 들어있다. 그는 기차, 지하철, 카페, 식당 등 어디든 틈날 때마다 수첩을 꺼내 끼적인다. 책은 2009년부터 14년간 써온 파무크의 내면의 단상을 묶었다.

파무크는 매일 8~10시간씩 성실하고 집요하게 쓴다. 그는 "어떤 작가들은 천천히 거북이처럼 쓰고, 어떤 작가들은 2, 3시간 앉아 4쪽을 쓴 후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며 "하지만 나는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시작은 일기였다. "이 공책에 너의 가장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가장 사적인 것을 쓰렴." 어머니는 7세 파무크에게 자물쇠 달린 일기장을 선물했다. 어린 파무크는 꾸준히 일기를 써왔다. 화가를 꿈꿨던 파무크는 22세 때부터 소설을 썼다. 54세 때 노벨문학상을 받고 난 후 2008년부터 다시 붓을 들었다. 가로 8.5㎝, 세로 14㎝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첩을 쫙 펼쳐 양쪽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더했다. 파무크의 '그림일기'다. 400쪽 분량의 '먼 산의 기억'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일기는 숲이 아니라 매일 보는 나무 하나하나를 쓰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을 출판할 때 주저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것을 출간하느냐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지금도 때로 출간을 후회한다는 파무크가 굳이 '일기'를 책으로 펴낸 이유는 그의 일기에 단서가 있다. 19세기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상집 '월든'을 언급한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 소로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일기장이다. 어느 하루에 대해, 주위의 자연에 대해 열정적으로, 지루해질 정도로 서술한다. (…) 소로가 '월든'을 위해 했던 것을 나는 이스탄불(튀르키예 수도)을 위해 하고 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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