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혈액형을 통해 사람들을 유형별로 구분 지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요즘 MZ세대들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가 제시하는 내향·외향성, 감각·직관, 사고·감정, 판단·인식 등의 지표를 조합해 서로의 복잡한 관계를 규정한다. 나이가 들어도 배워야 할 게 많은 세상이다. 혈액형, MBTI 분류법 이전에는 '똑부'·'똑게'·'멍부'·'멍게'로 간단하게 직장 상하관계를 분류해 술안주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들이니 20년도 훨씬 지난 안줏거리다. 당시 농담처럼 가볍게 씹어 뱉어낸 말들이 19세기 독일군 지휘교범에 수록된 지휘관과 하급자의 상관관계를 취급하는 태도에 따른 분류법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이 분류법이 군대처럼 수직적인 구조가 우선했던 사회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씹으면 씹을수록 그 재미는 더했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멍)청하고 (게)으른, (똑)똑하고 (부)지런한,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와 부하직원의 형태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뒷담화를 하고 우리 조직에 어떤 리더가 필요한지 희망찬 토론을 했던 추억도 있다. 뒷담화로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항상 최선의 리더는 '똑게'였고 최악은 '멍부'로 결론이 났다. 우리만큼은 '똑게'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 다짐은 알코올과 함께 증발되어 기억에 흐릿하게만 남았다.
부질없이 반복됐던 '평가질'이었지만 리더의 독선으로 구성원들의 창의성을 방해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고, 지혜 없이 욕심만으로 구성원들을 벼랑으로 이끌지 말아야 하겠다는 자아성찰은 그 시간만 할 수 있었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이후 경제·외교·안보 등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로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대한민국에서 45년 만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외신으로 보도되던 정치후진국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자고 일어나니 내 앞에 벌어져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역사의 순리에 역행하는 지도자의 선택에 시민들은 바람에 꺼지지 않는 응원봉을 촛불 대신 들고 거리로 나섰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그 자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남을 것이 분명하지만 불행의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함을 수많은 위기 속에서 경험한 시민들은 용감했다. 불행은 오롯이 구성원들의 몫이기에 더욱 그랬다.
역사 속에서 잠시 후퇴 중인 지금, 과거의 '꼰대식' 분류법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살아오면서 분류법에 따른 수많은 정치, 사회, 조직의 리더들을 경험했지만 그중 최악은 '멍부'인데 '똑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잘못된 소신을 품은 '멍부'라 할 수 있다. '멍게' 유형은 리더의 잘못된 결정을 똑똑한 구성원들이 바로잡아주지만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멍부'는 잘못된 결정을 구성원들이 손쓸 틈도 없이 실행에 옮기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후 '그'를 보며 작은 조직 속에서 남들이 평가하는 어떤 성향의 리더가 되어있는 나를 되돌아본다. 아쉽지만 20여 년 전 술자리에서 야심 차게 다짐했던 '똑게'는 되지 못했다. '똑부' 구성원들 덕분에 직을 연명하고 있지만 쓸데없는 부지런함을 고집하지 않은 점은 스스로 칭찬할 만하다. 올바르게 이끌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 속으로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