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한 사람들 중에는 한인들도 있었을 터인데, 필자 주변에는 공교롭게도 한 명도 없다. 다들 만나면 선거 얘기를 하지만 "그래서 당신은 트럼프에게 투표를 했어요?"라고 물어보기 마땅치 않았다. 그만큼 민감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워싱턴D.C.에 사는,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한 교포는 맞은편 이웃이 대선 기간 트럼프 지지 팻말을 세워둔 걸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 하려다가 꾹 참고 저녁을 할 기회에 이를 지적했더니, 그다음부터는 길에서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더란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집 고양이를 대신 맡아주던 친한 이웃이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막상 당선되자, 그것도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기양양하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필자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사실 예상치 못했다.
"사실 나 트럼프 뽑았어요." 필자가 방문한 워싱턴 근교 한인타운 센터빌(Centreville)에서 설렁탕을 먹던 그는 불쑥 물어보지도 않은 사실을 고백했다. 의외였다. 그는 확실한 진보 성향이었고, 한국과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중산층으로 정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트럼프의 승리보다 자신이 지지하던 민주당의 실책이 더 크다고 했다. 대선 100여 일을 앞두고 조 바이든 대신 투입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의 '무색무취'한 점, 소셜미디어 등에 집중하며 정작 서민들과의 스킨십이 적었던 점 등을 쭉 열거했다. "해리스 이 사람을 뽑으면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안 드는 거예요. 항상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니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민주당이 취하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관용 정책이 너무 극단적으로 가고 있는 점과, 낙태 지지 입장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기 딸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 것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이는 다른 한인 학부모들도 공유하는 우려란다.
무엇보다 역시 물가였다. "집세, 아이들 학용품, 음식, 하나하나 오르지 않은 것이 없어요. 우리 딸이 가는 미용실 주인은 파마할 때 쓰는 알루미늄 호일 헤어캡까지 올랐대요." 이런 상황에서 불법이민자에 대해 관대한 민주당의 정책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큰 반감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불법 이민자에게 엄격한 트럼프에 대한 아시안계, 히스패닉계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우리도 이민자 출신이지만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우리 세금이 불법 이민자 자녀들 무상 교육 등에 쓰이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거죠."
미국 대선의 주요 화두였던 저소득층 개선 문제를 두고, 해리스가 빈곤층에 직접 현금 지원책을 확대해야 한다고 공약한 것도 문제였다고 그는 지적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바이든이 코로나 때 현금을 엄청 뿌렸어요. 그게 물가 상승으로 고스란히 이어졌어요." 그는 민주당이 서민들의 삶과 유리된 ‘강남 좌파’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가 도덕적 결점을 갖고 있음을 지지자들도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매우 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에 실제로 장벽을 쌓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