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다’라는 관용구의 의미는 ‘지어내어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2020년 국회의원의 질의를 받고 “소설 쓰시네”라고 받아친 것에도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말로 소설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걸까. 최근 나온 소설집들은 이런 인식을 바꿔놓을 만큼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언론 매체의 전통적인 ‘보도’가 아닌 다른 전달 방식을 고민했다"는 미국의 비영리 독립 미디어 조직 그리스트, 한국의 시민단체, 소설가, 기자들이 나선 결과다.
‘2200년을 상상하라.’
기후변화를 다루는 독립 미디어 그리스트는 2021년 이런 주제의 기후 소설 세계 공모전을 열었다. 기후 위기를 알리는 새로운 전달 방식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실험이었다. 지난 15일 출판사 서해문집에서 나온 단편소설집 ‘우리에게 남은 빛’은 이 공모전 수상작을 묶었다. 다양한 인종의 과학자, 화산학자, 언어 병리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컴퓨터 엔지니어, 공상과학(SF) 소설 작가 등 여러 직업을 가진 이들이 저마다 170여 년 후라는 미래에 관한 상상력을 풀어놨다.
기후뿐 아니라 인종, 장애, 성 정체성 등의 의제도 포괄한다. 공모전 심사를 맡은 작가 에이드리언 마리 브라운은 ‘우리에게 남은 빛’의 서문에서 “우리는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엘리트와 유명인, 인플루언서들로부터 관심을 돌려야 한다”며 중요한 것을 놓치는 공론장의 현실을 꼬집었다.
기후 위기가 고조되면서 '기후(Climate)'와 '소설(Fiction)'을 합친 '클라이파이(Cli-fi)'라는 개념이 생길 정도로 관련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서해문집 측은 “우리는 문학 출판사는 아니지만 공모전의 취지 등을 보고 한국에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출판했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가장 뜨거운 주제다. 사교육 과열, 입시 경쟁, 학교 폭력 등 온갖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한국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이 작가들에게 병들어가는 한국 교육의 부조리를 소설로 쓰도록 한 이유다. 이 소설들은 한겨레에 미니픽션 ‘슬픈 경쟁, 아픈 교실’이라는 시리즈로 연재됐고, 최근 ‘킬러 문항 킬러 킬러’(한겨레출판)라는 단편집으로 출간됐다.
장강명 작가가 쓴 표제작은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대학수학능력시험 킬러 문항 배제’ 지시로부터 출발한 소설이다. 수능날 아침, 대학교수인 아버지는 수험생 아들에게 차세대 집중력 강화제를 먹이려 한다. 변별력을 위한 킬러 문항이 없는 올해 수능의 성패는 “실수하지 않는 것”에 달린 만큼 학부모들은 이 약을 구하느라 혈안이다. “다른 수험생들과 동등하게 (시험을) 치르겠다”며 복용을 거부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네가 정말 다른 수험생들과 동등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믿니? 여태까지 네가 누린 혜택들을 떠올려보렴. (...) 공정한 경기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어.”
장 작가는 이 책의 ‘기획의 말’에서 “저희의 목표는 독자님들이 무언가를 보게 하는 것”이었다면서 “저희가 본 것을 같이 봐주시고, 함께 괴로워해달라”고 했다. 그 ‘무언가’에 대해선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선생님들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무언가”라고 했다.
한국 사회라는 존재 자체를 다룬 소설집 ‘소설, 한국을 말하다’도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된 작품이 실렸다. 이를 기획한 박동미 문화일보 기자는 “보도가 아닌 ‘이야기’로 한국 사회와 문화, 그리고 한국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한국 문단에서 “가장 첨예하고 활발하게, 그리고 계속 쓰는” 작가들에게 4,000자 분량의 짧은 소설을 청탁했다. 인공지능(AI)과 콘텐츠 과잉, 번아웃, 새벽 배송, 사교육 등 사회적 문제들이 소설의 주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