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상품 회계처리와 관련한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이 불과 4일 만에 바뀌면서 ‘오락가락 행정’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적용 예외를 인정했다가 다시 예외는 없다고 뒤집으면서 신뢰를 저버린 것인데, 금융당국이 이를 강제하기 위해 던진 압박용 카드도 법령 근거가 없어 월권 논란까지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12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전날 금융감독원은 주요 보험사 임원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새 회계제도(IFRS17) 도입 이후 보험사들이 자체적으로 계산해오던 무·저해지 상품 해지율을 앞으로는 당국에서 제시한 ‘원칙모형’에 따라 계산하라고 지시했다. 금감원 측은 이 자리에서 "당국의 원칙 제시에도 불구하고 일부 회사가 예외모형을 택할 것이라는 언론의 의구심이 크다"며 "당장의 실적 악화를 감추고자 예외모형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IFRS17은 결산 시점의 시장금리를 감안한 할인율과 손해율, 해지율 등 최적 계리가정을 반영해 보험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데, 보험사의 자의적 가정 등으로 단기적으로 수익을 늘리고 미래로 위험을 이연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특히 무·저해지 상품은 납입기간 중 해지 시 환급금이 없거나 적은 상품으로, 보험사들이 높은 해지율을 가정해 수익성을 높이고 있다는 시각도 없잖았다. 관련 회계처리 방식을 놓고 혼란이 지속되자 앞서 7일 금융위원회가 진행한 제4차 보험개혁회의는 원칙모형을 제시했다. 다만 해당 상품 경험통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엄격한 요건을 충족하면 예외모형도 허용한다”고 했는데, 불과 4일 만에 금감원이 “원칙모형 외 예외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금융당국의 오락가락 행보에 보험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금감원 지시대로 모든 보험사가 원칙모형을 적용할 경우 대부분의 실적이 이전에 비해 크게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예외를 인정했던 이유는 경험통계가 없어 원칙모형이 맞는지, 예외모형이 맞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당장 원칙모형만 적용할 경우 대부분의 보험사 실적이 이전에 비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무·저해지 판매 비중을 높여온 일부 보험사는 원칙모형을 적용할 경우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K-ICS)이 기준 이하로 떨어져 금융당국의 적기시정조치(경영개선 권고·요구·명령)가 부과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또 다른 보험업계 관계자는 "이미 수개월에 걸친 보험개혁회의를 통해 업계와 금융당국 실무진이 예외모형 허용을 합의했고 발표까지 한 상태였는데 금감원이 갑자기 틀어버렸다”며 “점진적으로 적용하는 등의 방안도 있을 텐데,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계산 방식을 한 방에 강제하는 게 당국이 할 일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례적일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던진 당국에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금감원은 전날 간담회에 앞서 다수의 보험사에 “예외모형을 선택할 경우 대주주 면담을 진행하겠다”고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보험사 관계자는 "이 문제 가지고 대표이사도 아닌 대주주 면담까지 운운하는데, 법적으로 가능한 건지도 의문"이라며 "이게 겁박과 월권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도 “약속을 뒤집은 건 금감원이면서, 보험사들을 범죄 집단으로 취급한다”며 “한국전력이 적자라고 한전 대주주인 산업은행 회장을 불러 전기료 올리라고 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말을 바꾼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설명자료를 내고 "금융당국은 일관되게 원칙모형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며 "예외모형은 각사의 경험통계 등 특수성이 입증된 경우에 한해 적용 가능한 매우 제한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