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이 29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에 공습을 가해 최소 112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20여 명은 어린아이였다. 최근 '우방'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내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 개선을 요구해 온 미국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고 있다.
이스라엘 지상군 공세가 재개된 가자지구 북부의 베이트 라히야 지역에서 이날 새벽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받은 5층짜리 주거용 건물이 무너져 최소 93명이 숨졌다고 영국 가디언과 미국 뉴욕타임스 등이 전했다. 사망자 중 25명은 어린이였고, 건물 잔해에 깔린 것으로 추정되는 40명은 실종 상태라고 한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현지 의료 소식통을 인용해 사망자 수를 "최소 143명"이라고 보도했다.
참사 직후 이스라엘군은 "민간인 피해를 보고받고 조사 중"이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같은 날 밤늦게 베이트 라히야 주거지를 재차 공습했다. 이 공격으로 최소 19명이 숨졌다고 알자지라는 30일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끔찍한 학살"이라고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미국도 이스라엘을 향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끔찍한 사건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며 "전쟁의 여파를 피해 도망쳐 온 20여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스라엘 정부에 더 많은 정보를 요청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사상자와 이재민이 급증해 인도주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는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이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은 여전하다. 가뜩이나 식료품이 태부족한 가자지구로 유입되는 원조의 규모는 전쟁 1년 사이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달 1일부터 22일 사이 가자지구에 반입된 구호 트럭은 704대로, 3,000대 수준이던 9월에 비해 약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유엔을 인용해 보도했다. 유엔은 이스라엘 당국이 '보안'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구호트럭을 막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전날 국제사회 규탄에도 가자지구 '생명줄'로 불려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가 이스라엘 및 동예루살렘 등 점령지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안까지 크네세트(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테러에 UNRWA 직원 일부가 개입했다는 게 이스라엘 판단이다.
이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9일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부를 것"이라며 "UNRWA 활동을 허락해 달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보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도 30일 "UNRWA 활동을 약화하는 모든 시도에 강력히 경고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15개국 이사국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지원 확대를 압박해 온 미국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하고 있다. 앞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13일 이스라엘에 "향후 30일 내 가자지구의 인도적 지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조처를 취하라"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날렸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조치가 미흡할 경우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 중단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FT는 "미국의 위협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 북부는 여전히 지원이 차단된 채 맹렬한 폭격을 받는 등 상황이 더 악화했다"며 "주민 수만 명은 피란민 신세가 됐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