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겨 죽여도 모르는 퇴역 경주마… 허울뿐인 말 이력제

입력
2024.10.23 17:50
15개 시민단체 구성된 말 복지 수립 범국민대책위원회
퇴역마의 학대 방지 대책 마련 및 말 복지 법제화 촉구



"퇴역 경주마는 물론 국내에 있는 모든 말이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사회의 방임 속에서 방치되고 있다."
말 복지 수립 범국민대책위원회

동물자유연대, 비글구조네트워크 등 15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말 복지 수립 범국민대책위원회는 23일 서울 종로구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퇴역 경주마의 학대 방지 대책 마련 및 말 복지 법제화를 촉구했다. 위원회는 "지금껏 산업의 도구로만 취급된 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을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충남 공주시 말 농장에서 말 8마리가 2개월간 방치돼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그곳에는 지금도 갈비뼈가 불거질 정도로 야위고 굶주린 상태의 말 18마리가 오물과 사체들 속에 방치돼 있다. 이번에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마주는 지난해에도 말을 불법 도살해 벌금을 선고 받았고, 재작년에는 퇴역 경주마를 포함한 말 4마리를 방치해 2마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원회는 "서울경찰청 기마대 퇴역마와 같이 공공기관에서 헌신한 말조차 이곳에 매각됐으며 현재는 생사 확인조차 불가능한 상태”라고 전했다. 농장에 남은 18마리 말 가운데 마이크로칩 조회가 가능했던 16마리 중 1마리를 제외한 15마리가 말 산업 정보 포털 사이트상 소유주와 실소재지가 달랐고 살아 있는 3마리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말 학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말 보호, 관리를 위해 기본으로 필요한 '말 이력제 의무화'가 시행되지 않고 있어서라는 게 위원회 측 주장이다. 경주마의 경우에도 마주는 은퇴 이후 말들이 어디로 가는지 말 산업 정보 포털에 등록할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퇴역 이후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 않는 '용도 미정' 비율은 연평균 10% 이상에 달하며, 관상용, 승마용 등으로 등록됐어도 실제 사례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동물의 권리나 지위와 같은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용하는 동물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소한의 보호∙관리 의무조차 단 한 줄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의 책임은 경마를 통해 매년 수조 원을 벌어들이는 한국마사회와 동물복지 담당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 있다"며 "이들은 올해 2월 '말 복지증진 추진 협의체'를 구성했지만, 8개월간 유의미한 성과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진아 동물자유연대 사회변화팀장은 "문제 해결을 위한 화살은 말 복지를 공백으로 비워둔 말 산업 시스템을 향해야 한다"며 "한국마사회와 농식품부의 방임에 근본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조현정 동물권행동 카라 정책기획팀장은 "퇴역마의 복지 개선 내용을 담은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21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산업계의 반대와 소관부처의 소극적 자세로 법안이 자동 폐기됐다"며 말 복지 법제화를 촉구했다.

고은경 동물복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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