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국부’ 아들이 영국 망명한 이유는?… 리콴유 가문 ‘형제의 난’

입력
2024.10.24 04:30
2015년 리콴유 사후 자택 처리 놓고 가족 불화
2022년 영국 망명 신청 후 2년 만에 받아들여

싱가포르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 초대 총리의 차남이 영국으로 망명했다. 선친의 유지를 둘러싸고 2017년부터 진행돼 온 ‘형제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23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리셴양(67)은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2022년 영국에 신청했던 정치적 망명이 받아들여졌다”고 밝혔다.

리셴양은 망명 사유로 ‘고국의 공격’을 꼽았다. 그는 “싱가포르 정부는 내 아들을 기소하고, 아내를 징계했으며, 가짜 경찰 조사를 벌여 몇 년간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이어 “영국 정부는 내가 박해받을 위험에 처해 싱가포르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덧붙였다.

리셴양은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1959~90년 재임)의 둘째 아들이자, 2004년부터 20년 집권한 뒤 올해 5월 선임장관으로 물러난 리셴룽(72) 전 총리의 동생이다. 2015년 리콴유 사망 이후 리 전 총리와 장녀 리웨이링 싱가포르 국립 뇌신경의학원 원장, 리셴양은 ‘사후 자택을 기념관으로 만들지 말고 헐어버리라’는 선친의 유훈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왔다.

동생들은 리 전 총리가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생가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가 ‘리콴유 왕조’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아들 리홍이에게 권력을 세습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는 리셴룽을 형제로도, 지도자로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리 전 총리는 생가를 국가 유산이나 랜드마크로 보존하는 방안은 정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맞섰다.

갈등은 리셴양이 리콴유 유언 관련 사법 절차에서 거짓 증거를 제공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가족 불화를 넘어 공적 영역으로 번졌고,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는 2022년 부인과 함께 싱가포르를 떠나 영국과 홍콩 등 해외를 떠돌았다. 이달 9일 누나 리웨이링이 사망했을 때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리셴양은 22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도 싱가포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발전된 경제적 번영 이면에는 정부의 억압이라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가 △무기 거래 △검은돈 △마약·가상화폐 자금 분야 핵심 촉진제가 되고 있다며 “싱가포르의 역할을 전 세계가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싱가포르 정부는 성명을 내고 “싱가포르는 국제적 기준에 부합해 자금세탁과 불법 금융 흐름을 억제하고 막는 탄탄한 체계를 갖췄다”고 반박했다. 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초대 총리의 자손이라도 수사 대상이 되고 법정에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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