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가 상원의 '세습 귀족 의석 폐지' 논의를 본격화했다. 14세기에 양원제가 도입된 뒤 약 700년간 이어진 영국 의회의 세습 정치가 종식될지 주목된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영국 하원은 이날 2차 독회를 열고 상원의 세습 귀족 의석을 박탈하는 법안 초안을 승인했다. 하원 후속 논의 및 표결, 상원 논의를 거치는 법안 처리 절차가 전면 개시됐다는 의미다. 영국 의회는 비선출직인 상원의원 약 800명과 선출직인 하원의원 650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법안은 영국 상원의 세습 귀족 의원 88명을 정조준하고 있다. 공작·후작·백작 등 후손에게 작위와 영지, 상원 의석을 물려줄 수 있는 의원들에 한정해 직위를 박탈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성공회 주교와 종신 귀족(스포츠 스타 등 총리·국왕으로부터 세습 불가능한 작위를 받은 귀족) 등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본인 대(代)에서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세습 정치를 겨냥한 상원 개혁 시도는 올해 영국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한 데 따른 결과다. '귀족 정치 철폐'를 주장해 온 노동당이 지난 7월 선거를 통해 하원 650석 중 412석을 차지하면서 개편 논의도 불붙었다. 특히 노동당 소속 키어 스타머 총리는 선거 기간 중 '의회 권력 세습은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대대적 개혁을 예고했다. 애초 750석이 넘었던 상원의 세습 귀족 의석을 1999년 92석까지 축소한 것도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였다.
실제 법안의 통과 가능성도 크다. 하원을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는 데다, 상원에는 법안 처리를 막을 권한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영국 상원은 하원에 법안 수정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단순 자문에 불과할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게다가 상원의원에게 제공되는 특혜에 대한 국민 반감도 상당하다. AP는 "상원의원은 런던 의회의사당 내 호화 시설과 하루 최대 361파운드(약 65만 원) 업무추진비를 누릴 수 있다"며 "내년 법안 가결이 유력하다"고 전망했다.
나아가 노동당은 상원을 '선출 의회'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성공회 주교와 종신 귀족도 이참에 퇴출하고 상원 의원을 선거로 뽑자는 것이다. 당초 노동당은 아예 '상원 폐지'를 주장했으나 보수당 반발을 의식해 목표를 하향 조정했다. 또한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논의 과정에서 노동당 인사들이 과열된 하원 논의를 중재하는 상원 기능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고 AP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