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미국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곳은 7개 경합주(州)다. 나머지 43개 주는 대략 승자가 정해졌지만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애리조나·네바다·조지아·노스캐롤라이나 7개 주는 박빙 상태이기 때문이다.
경합주 중에서도 펜실베이니아는 선거인단 규모가 19명으로 가장 많다. ‘키스톤(keystone·핵심) 스테이트’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이유다. 그래서 승리로 가는 민주·공화 양당의 길은 모두 펜실베이니아로 통한다. 특히 펜실베이니아의 경우 2016년엔 도널드 트럼프, 2020년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각각 승리했다. 그네를 탄 ‘스윙 스테이트’인 셈이다.
11월 5일(현지시간) 대선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 트럼프 전 대통령 둘 중 누가 펜실베이니아를 가져갈지 가늠하기는 현재로선 어렵다. 미국 여론조사 분석 사이트 리얼클리어폴링(RCP)에 따르면 7일 기준 펜실베이니아 유권자 대상 지지율 조사 결과 두 후보 평균값은 48.2%로 동률이다.
미국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 4일 수도 워싱턴에서 6시간을 운전해 펜실베이니아 북서부 도시 이리(Erie)를 찾았다. 펜실베이니아 내 67개 카운티(기초 행정 구역) 중에서도 ‘스윙 카운티’는 노샘프턴과 이리 두 군데뿐이다. 이리카운티 승자가 2016년과 2020년 대선 승자였다는 얘기다.
이리는 실제로 ‘키스톤의 벨웨더(bellwether)’로 불리는 곳이다. 벨웨더는 미래에 벌어질 일로 안내하는 사람이나 사물, 즉 길잡이나 전조 같은 것이다.
이리를 찾기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이리캠퍼스의 정치학 교수 로버트 스필에게 카운티 유권자의 ‘표심’을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가 추천한 곳이 밀크리크였다. 그는 “도시 민주당원 3분의 1, 농촌 공화당원 3분의 1, 두 그룹이 섞인 교외 중도층 3분의 1로 유권자군이 구성된 이리카운티에서 밀크리크는 가장 큰 교외 지역”이라며 “스윙카운티의 스윙타운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선 일견 해리스가 ‘대세’ 같았지만 ‘샤이 트럼프’(성향을 감추는 트럼프 지지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밀크리크 지역 주택가를 차로 한 바퀴 돌아보니 집 앞마당에 꽂힌 팻말 기준으로는 ‘해리스’가 일단 많고 눈에 잘 띄었다. 다만 일부 주택 그늘진 마당 구석에는 ‘트럼프’ 팻말도 숨어 있었다.
인터뷰 분위기도 해리스 편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는 여남은 명 중 셋에 불과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샤이 트럼프일 법한 이가 적어도 셋이었다. 모녀로 보이는 백인 중년·청년 여성 둘은 “아이 귓불을 뚫으러 얼른 가야 한다”며 자리를 피하고서는 멀찍이서 기자를 돌아보며 “노 카멀라(해리스는 아냐)”라고 말했다. 한 백인 중년 남성은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트럼프 지지자가 자주 하는 말이다.
트럼프 지지자는 이유가 분명했다. “경제 관리를 잘한다. 증명됐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해리스의 장점을 칭찬하는 지지자는 드물었다. 트럼프가 싫어서 해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다. 밀크리크몰 보안 요원인 잭 재블런스키(70)는 “이민 급증 문제의 미결은 바이든의 실책이고 환경오염 요인 프래킹(고압 액체로 암석을 부수고 셰일가스를 추출하는 기술)을 막지 않겠다는 해리스의 전향도 실망스럽다. 하지만 트럼프가 싫어 해리스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논쟁에 말려들기 싫다”며 자기를 소개하지 않은 백인 중년 여성은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든’(Anyone but Trump) 스티커로 장식된 자기 차를 대신 보여 줬다.
두 후보 지지 이유는 경제와 임신중지(낙태)가 많았다. 싸다는 평판을 듣고 2시간을 운전해 밀크리크몰에 왔다는 중부 펜실베이니아 토박이 공화당원 밥 포클(55)은 “바이든 시절 인플레이션(고물가)이 심각해졌고 앞으로도 안 좋을 것 같다”며 “모자 하나 가격이 35달러(약 4만7,000원)나 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임대 중개업체 직원으로 일하다 휴직 중인 아들 브래드(23)는 “최근 2, 3년간 물가 상승 폭이 너무 커 미래를 생각하기 힘들 지경”이라고 불평했다.
해리스 편 얘기는 달랐다. 민주당원인 돈은 “물가에 다들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 괜찮아지는 듯하다. 임신중지가 어쩌면 더 중요한 이슈”라며 “19세인 딸이 첫 투표를 해리스에게 하겠다고 내게 선언했다”고 전했다. 20대 딸과 함께 밀크리크몰을 찾은 무당파 백인 여성 에이미(56)는 낙태를 잘못으로 보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임신중지에 관한 한 ‘프로초이스’(여성 선택권 옹호)라고 했다. 그는 “트럼프는 끔찍하고 부도덕할 뿐 아니라 여성을 비하한다. 인플레이션 시작도 트럼프 때였다”고 지적했다.
미국 뮬렌버그대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펜실베이니아 민주당 지지층이 꼽은 핵심 현안은 경제·물가(18%)가 아니라 임신중지(25%)였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윌리엄 갤스턴은 이달 초 보고서에서 “펜실베이니아 교외의 온건 성향 공화당원 여성이 임신중지권 때문에 지지 후보를 해리스로 바꿀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화당 상징색은 붉은색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짙은 파랑이던 승부처 펜실베이니아는 갈수록 붉어지고 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네 번의 대선에서 전국 득표율을 평균 2%포인트 웃돌던 민주당의 펜실베이니아 득표율은 트럼프가 등장한 2016년 대선 때부터 전국 평균을 하회하기 시작했다.
짐작할 만한 배경은 공화당 저변 확대다. 아직 펜실베이니아에는 민주당원이 더 많기는 하다.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에 따르면 올 1월 기준으로 △민주당원 392만5,766명 △공화당원 358만2,695명 △무당파 140만659명이다. 하지만 2000년 당시에는 △민주당 422만8,888명 △공화당 354만3,070명 △무당파 131만9,004명이었다. 민주당 우위 정도가 24년 만에 68만여 명에서 34만여 명으로 반토막이 난 셈이다.
민주당에 대한 환멸이 큰 이유다. 공화당원인 60대 백인 여성 일레인은 “트럼프는 차악(less evil)”이라며 “줄곧 민주당 지역이던 이리가 민주당 행태에 질려 바뀌고 있다”고 했다. 변심은 진행형이다. 민주당원인 흑인 남성 제베디 앤더슨(65)은 “투표를 할지 말지 모르겠지만 미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찍겠다”고만 했다.
더욱이 드러난 ‘친(親)트럼프’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트럼프 지지가 자랑스럽기는 어렵다. ‘저학력 빈곤 고령’이라는 트럼프 지지 집단 특성은 소속감을 갖기에 부정적이다. ‘무식하고 가난한 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이들이 광활한 농촌에 흩어져 사는 경우가 많아 여론조사망에서 자주 빠져나가기도 한다는 게 전문가들이 토로하는 애로다.
“투표했지만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게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리카운티 사람들의 적잖은 반응이었다. 지지하지 않아도 투표하게 하는 힘은 트럼프 저력이다.
해리스 지지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실속이 적다는 게 민주당 걱정이다. 밀크리크 인근 머시허스트대에서 만난 여학생 애슐린 호턴(19)은 “해리스가 더 나은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도 투표할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발을 뺐다. 정치 외면은 청년층이 지지 기반인 민주당에 더 큰 손해다.
지난 7월 야외 유세장에서 트럼프가 암살시도범 총을 맞은 펜실베이니아주 서부 버틀러는 공화당원이 민주당원의 두 배가량 되는 ‘레드카운티’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가 '펜실베이니아 축소판' 이리카운티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농촌과 블루칼라(생산직 종사자)의 공화당 지지세가 근소 우위에서 압도적 지지로 변한 덕이었다. 5일 버틀러 도심 주택가에서 만난 무당파 유권자 에번(33)의 말은 전조처럼 들렸다. “트럼프는 뭐라도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해리스는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