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단체 5곳 "인력추계위 불참"… 증원 백지화에 스스로 발목 잡힌 의사들

입력
2024.10.03 04:30
의협·전의교협 등 "내년 증원 재논의가 우선돼야"
입장 변화 없는 전공의에 의사들 눈치 보기 '급급'
"전공의도 추계위 참여 등 타협점 찾아야" 지적도

8개월째 접어든 의료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권은 여야의정 협의체, 정부는 인력수급추계기구 구성을 추진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의대 증원 백지화'만 부르짖는 전공의 눈치를 살피느라 의사단체들이 사회적 대화 참여를 꺼리는 탓이다. 타협론이 부상하거나 대안이 거론되면 전공의들이 반발하고 결국 의사단체가 논의에서 발을 빼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그간의 패턴이 이번에도 재현되고 있다.

정부는 연내 의사인력수급추계위원회(추계위) 설치를 위해 의사단체 10곳에 오는 18일까지 위원 추천을 요청했지만 의사계 반응은 싸늘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대한의학회, 전국의과대학교수비상대책위원회,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등 5개 단체는 2일 공동 입장문을 통해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포함해 의제 제한 없는 논의가 우선"이라며 "추계위 위원 추천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의협의 경우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2025학년도 증원 백지화 언급 없이 2026학년도 정원 감원 보장을 요구하는 등 다소 전향적 변화를 보였다가 2일 만에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추계위 구성 논의를 계기로 의정 대화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전날 페이스북에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에 대한 입장 변화 없다"며 "의협 임현택 회장은 사직한 전공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날을 세운 이후 의사단체들의 입장은 다시 강경해졌다. 기성 의사들은 의료 사태 당사자인 전공의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제안한 2026학년도 정원 재논의,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여야의정 협의체 출범 같은 타협안도 의사계 일각에서는 긍정적 반응이 나왔으나 대전협이 논의 자체를 거부하면서 뚜렷한 진전 없이 공회전만 하는 상태다.

그렇다고 모든 의사들이 추계위 설치 전제 조건으로 의대 증원 백지화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추계와 최종 결정 모두 정부 기관에서 이뤄지는 구조가 객관성과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도 "의료인력 수급추계는 '어떤 의료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대한병원협회와 상급종합병원협의회 등은 추계위 위원을 추천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급종합병원협의회 관계자는 "추계위는 중장기적 의료인력 수급 체계와 관련된 문제"라며 "의료 사태나 전공의 입장과는 별개로 출범시키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추계위 설치는 대전협 7대 요구안에도 포함돼 있다. 추계위 과반 참여를 보장하라는 의사계 요구에 정부는 위원 13명 중 과반인 7명을 의사단체 추천 몫으로 배정했다. 그러자 의사단체는 추계위를 의결기구로 격상해 달라는 새로운 요구를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추계위는 의료계 요구 사항이었다"며 "18일까지 위원 추천 기간이 3주 남았으니 의사단체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참여를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도 정부가 전공의 요구안을 상당 부분 수용한 만큼 전공의들도 추계위 참여 등 현실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수도권 한 대학병원 원장은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의사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지면서 환자 진료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며 "일부 전공의에게 의료계 전체가 휘둘리는 상황이 지속되는 건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도 "전공의 복귀가 최우선 과제라 일단 전공의들과 보조를 맞추고는 있지만 전공의들이 줄곧 입을 닫고 있어 답답하다"며 "내년도 의대 정원을 철회하라는 주장에 갇혀 있지 말고 협상장에 나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