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기 포비아’로 일상 마비된 레바논… ‘무장 사회’ 면모도 확인

입력
2024.09.2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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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휴대폰·노트북 터지나" 일상이 공포
"전쟁 원치 않지만 구석 몰렸다" 위기감 고조

레바논 전역에서 벌어진 친(親)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 겨냥 무선호출기(삐삐)·무전기(워키토키) 동시다발 폭발 사건 이후 레바논의 일상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이번엔 휴대폰·노트북이 터지는 게 아니냐’는 ‘전자기기 포비아(공포증)’가 일상을 잠식했다. 5년간 지속된 경제 위기로 시름하던 상점들은 또다시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손님 끊긴 레바논 전자제품 판매점

영국 더타임스는 19일(현지시간) 레바논에선 전자기기를 들고 있는 것은 폭탄을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긴다며 수도 베이루트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케보르(44)는 요즘에는 누구나 휴대폰을 원하지만 이번 폭발 사건으로 손님이 끊겼다고 전했다. 매상을 걱정하는 남성복 매장 주인 지아드 타바라(61)는 "이제는 휴대폰·노트북과 같이 겁내지 않아도 됐던 것들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실제로 18일 일부 지역에서 휴대폰과 노트북 폭발 신고도 잇따랐다.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이 목전에 다다랐다는 우려도 시민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자동차 라디오 판매점 사장 니콜라스(47)는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는 목표물만 제한적으로 타격했는데 이번엔) 헤즈볼라의 심장을 쳤다. 레바논과 헤즈볼라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지금은 구석에 몰렸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대응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레바논 사회 뿌리내린 헤즈볼라

삐삐·워키토키 폭발 사건으로 헤즈볼라가 레바논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확인이 됐다. 폭발이 마트, 택시, 길모퉁이, 집 등 일상적 장소에서 일어난 것만 봐도 그렇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번 공격으로 사망한 37명 대부분은 헤즈볼라 전투원으로 추정되지만, 3,000여 명의 부상자 중에는 간병인, 교사, 자영업자 등 헤즈볼라의 무장 투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들은 헤즈볼라 정규 대원은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헤즈볼라와 연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헤즈볼라와 가까운 한 주민은 "삐삐 사용자는 한 가지 직업만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WP에 귀띔했다. 또 다른 주민은 "이 지역에서는 모두가 (헤즈볼라) 저항 세력의 일부"라고 했다. 조셉 바후트 베이루트아메리칸대 공공정책연구소장은 “헤즈볼라는 작은 전투 집단이 아니라 레바논 사회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있는 거대한 수평 조직”이라며 “하나의 ‘무장 사회’”라고 말했다.

WP는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망가진 정부가 줄 수 없는 일자리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지역에서 깊은 지지를 받는다"고 짚었다.

이동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