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부단히 읽고 쓰는 사람이다.
2015년 6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제목의 한국일보 칼럼을 시작으로 신문에 실리는 글을 왕성하게 써왔다. 2018년 9월 추석을 앞두고 경향신문에 기고한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로 '칼럼계의 아이돌'로 급부상했다. "서울대에 위장 취업한 자유인"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리드미컬한 그의 글은 재미를 추구한다. "성적이 안 좋다고 여러분들 엄마가 연구실에 찾아와서 저를 괴롭히면, 저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엄마를 불러올 수밖에."(2020년에 낸 책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김영민식 유머는 읽는 사람과 잘 읽지 않는 사람 모두를 사로잡았다.
김 교수는 자칭 "까칠하고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안면 식별이 안 되도록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게 그가 내건 인터뷰의 첫째 조건이었다. 시선은 '꼰대'이기를 거부한다. "출근만으로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고 느낀다" "권력자가 지나치게 설치거든 나직하게 중얼거려라. 세계는 당신 것인지 몰라도 삶만큼은 내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회의 혈전이 되면 안 된다" 같은 문장을 썼다.
김 교수에게 읽고 쓰는 행위란 쾌락 그 자체다. 어릴 적부터 집에는 늘 전집류가 구비돼 있었다. 일찌감치 독서 습관이 잡혔다. "독서는 직업상 안 할 수가 없고, 남들과 차이가 있다면 좀더 넓게 읽는다는 걸 겁니다." 그가 '겸손하게' 말했다. 웹툰, 무협지부터 한국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읽는다. 독립영화를 보고, 미술 전시장도 즐겨 찾는다. 평범한 한국 중년 남성에게는 보기 드문 식성이다. "어쨌거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김 교수의 글솜씨는 일찍이 공인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던 1998년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 대한 평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서 당선됐다. 칼럼과 산문을 엮어 낸 책도 여러 권이다. 그 많은 양을 언제 쓰고 읽는 걸까. 김 교수는 '루틴'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다. 피겨퀸 김연아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며 매일의 운동 루틴을 따르듯 그 역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별 생각 없이 쓰고 읽기를 반복한다. 그는 잠에서 깨 기운이 뻗치는 오전에 주로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드는 글을 쓴다. 오후에는 읽고, 저녁엔 영상물을 본다.
지난 7월에는 2007년부터 17년간 쓴 일기, 메모 등 2,000여 개의 짧은 글 중에서 선별한 글 365개를 묶은 단문집 '가벼운 고백'을 펴냈다. "(글의 종류에 따라) 문체는 분명히 달라야 해요. 칼럼에 필요한 스타일과 논문에 필요한 스타일은 나아가면 어떤 지점에서 만나겠지만 기본적으로 장르가 다르기에 명백하게 구별해서 쓰고 있고, 그렇게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막힘없이 술술 쓰는 편이다. 평소 생각도 많은 데다 뭐든 떠오르는 대로 끼적이는 메모광이라서 글감이 떨어질 새가 없단다. 수많은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글을 쓴다.
'교수는 글을 못 쓴다'는 출판계 내 광범위한 합의에는 자못 신경 쓰인다. "교수의 문제는 자기 머리에 든 것을 옮겨 적기만 하면 사람들이 즐겁게 읽을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자기 에고에서 벗어나 독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김 교수의 장기인 에세이는 자기 삶을 재료로 삼는 장르 아니던가. 그는 "에세이는 소설처럼 3인칭 시점을 채택해 뒤에 숨을 수 없고, 직구를 던져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장르"라면서도 "제가 갖고 있는 인생과 사회, 예술이라는 세 가지 관심사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고 했다. "에세이는 일상에서 무언가를 포착해 낸다는 데서 삶과 관련 있고, 생각을 담아야 된다는 점에서 학문이랑 연결돼 있어요. 문학의 한 장르로서 예술적 감동이 요청되는 장르기도 하지요."
"마침내 평생 읽을 책을 다 산 거 같다. 내일부터는 내세에 읽을 책을 사기 시작해야겠다."('가벼운 고백' 중에서) 김 교수는 많이 쓰는 만큼 닥치는 대로 책을 사들인다. 자택 서재와 학교 연구실에 있는 그의 서가에는 지금 읽는 책과 앞으로 읽을 책, 책을 못 구할 때를 대비해 미리 사놓은 책 등이 '무질서 속 질서'를 이루며 채워져 있다. 책이 몇 권 있는지 세는 것조차 무의미한 단계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읽는 속도가 읽고 싶은 책이 계속 나오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그 갭에서 오는 어떤 괴로움이 있다"고 말했다. 거친 분류에 따라 대충 꽂아둔 책을 못 찾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책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못 찾으면 너무 괴롭잖아요. 결국 또 한 권을 사게 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요. 같은 상황이 세 권째 반복된다? 굉장히 자괴감이 들게 되죠." 책 일부는 파괴해서 PDF 파일화해뒀는데 그 수량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김 교수는 동네책방도 자주 찾는다. "큐레이션이 훌륭하고, 방문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독립서점"을 주로 찾는다. 서점에서 나올 때는 빈손이면 미안해져 몇 권씩 꼭 사들고 온다. 서점에 가기 전까지는 무슨 책을 살지 모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그의 단골 서점은 세계문학을 주로 취급하는 서울 마포구의 '서점극장 라블레'다. 불문학 전공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을 쓴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에서 딴 이름이다. "큐레이션이 제일 마음에 들고, 서점 주인이 충분히 과묵한 게 장점입니다. 저 같은 내성적인 사람은 누가 자꾸 말 시키면 고역이거든요. 라블레는 필요할 때만 (손님의) 자문에 응하는 딱 적당한 분위기예요." 서울 서대문구의 '밤의 서점' 큐레이션도 그의 마음에 쏙 든다. 작지만 강한 1인 출판사인 빈서재(일본 분야)와 오후의 소묘(그림책 분야) 등도 그가 눈여겨보고 있는 곳들이다.
최근 산 책 중 재미있게 읽은 건 케니스 커밀, 존 더럼 피터스의 '난잡한 지식'이다. 학술서이지만 재미있고 예화가 많아 읽기 어렵지 않다고. 언론인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란다.
김 교수는 고전 읽기와 역사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고전 중 고전. "누군가 한국 정치에 대해 심각하게 한번 고민해 보겠다고 한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이 책으로 시작하라고 추천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집을 나와 살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 '집이 없어'는 최근 가장 몰입해서 읽은 책으로 꼽았다. 역사책은 단연 '사기열전'. 그는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고 꼭 기사에 써달라"고 했다.
김 교수의 독서량은 하루에 평균 한 권 이상. "두 번 읽을 책을 찾기 위해 처음 읽는다"는 그에게 정독이냐 다독이냐 논쟁은 "좋은 이분법이 아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정독이 필요한지 빨리 읽고 제칠 수 있는 책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처음 읽을 때부터 다시 봐야 할 부분을 표시해가며 읽는 것도 방법이라고. 그렇게 두 번째 읽을 때 표시된 부분 위주로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책을 빌리지 않고 반드시 사서 본다. 책 속 중요 내용에 인덱스를 해두기 위해서다.
"요즘 사람들 유튜브 참 많이 보죠. 유튜브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건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 된다는 거예요. 책이라면 비슷한 분량의 정보를 한 페이지에 담을 수 있고, 읽어내는 시간이 훨씬 적게 들 수 있거든요. 짧은 시간 안에 직접적인 지식의 이동이 가능한 매체로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책을 따라올 수 없죠." 김 교수가 꼽은, 여전히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