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판매대행사가 10년 쌓은 비자금 225억... '병원 리베이트' 실탄이었다

입력
2024.09.15 10:00
[의약품 CSO 비자금 사건의 전말]
전국 병원에 170억 리베이트 뿌린 정황
거래처와 한통속... 가짜 거래로 돈 쌓아
세무당국도 돈으로 매수... 법정 위증도

유명 화장품 개발·생산(ODM) 전문 기업의 계열사로 설립되어 '피부질환 전문의약품 판매대행'을 주력 사업으로 내건 회사가 있다. 창립 5년 차엔 연 누적매출 270억 원을 달성하며 '폭풍 성장'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던 A사다.

승승장구하던 A사는 지금 주요 경영진의 사법리스크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표 최모(63)씨와 상무 김모(48)씨는 구속 상태로, 본부장 조모(53)씨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세 사람은 225억 원 상당의 비자금 조성, 세무공무원 로비, 그리고 위증 등 혐의를 받고 있다.

수백 억 원의 비자금. A사 경영진은 왜 검은 돈을 만들었던 것일까.

공인회계사가 세무 증빙자료 조작

화려한 외면과 달리 A사는 설립 초기부터 문제가 많았다. 경영진은 거래처인 하위 의약품 판매대행(CSO)업체와 '가공 거래'를 하며 검은 돈을 쌓았다. 통상 이 업계에서는 ①제약사가 의약품 마케팅(홍보) 영업을 A사와 같은 영업대행사(CSO)에 의뢰하면 ②해당 업체들은 하위 CSO업체들에 하도급을 주고 ③하위 업체들이 병·의원에 직접 영업을 뛴다.

A사는 하도급 업체와의 거래를 가장해 회삿돈을 유출한 후 수수료를 제외한 현금을 반환받는, 이른바 페이백 수법을 즐겨 썼다. 이 과정에서 하위 업체와 짜고 실거래 없이 허위로 세금계산서를 꾸미기도 했다. 그렇게 A사의 비자금 곳간은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그런데 곧 위기가 닥쳤다. 2019년 세무조사 압박이 조여오자, A사는 공인회계사 임모(48)씨를 세무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잘나가는 회계전문가라던 임씨의 위기 해법은 '가짜 자료' 만들기였다. 그는 "세무조사를 무마해달라"는 경영진의 청탁과 함께 2억9,000만 원을 받아 챙기곤 한 패가 됐다. 가짜 '처방전 실적 통계표'를 만들어 세무조사에 대비했고, 허위 세금계산서 발급·처리도 도왔다. 나아가 임씨는 2020년 한 코스닥 상장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엔 아예 A사의 가공거래 상대방 역할을 해주며 16억 원 상당 허위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도움 수준을 넘어 본격적으로 비자금 축적의 한 축이 된 것이다.


세무공무원 입 막고... 법원 감쪽같이 속여

임씨의 범행은 대담해졌다. 학연 등 자신의 인맥을 적극 이용해 국세청 출신 '전관 세무사'를 찾아갔다. A사의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 알선해달라고 부탁하며 뒷돈을 찔러줬고, 2022년 관할 지방국세청의 합동 세무조사가 개시되자 이번에는 현직 팀장급 세무공무원 조모(54)씨를 만나 A사에 대한 조사 상황 등 내부 정보를 요구하기도 하고, 원만히 종결되도록 청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현직 세무공무원 5명은 인당 500만~8,000만 원씩 A사의 검은 돈을 받아 챙겼다. 심지어 먼저 돈을 대놓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현직 공무원은 식당 방 한 켠에서 대놓고 봉지에 든 현금 다발을 전달받기도 했다. 전화통화나 문자메시지로 "이렇게 하기로 정리됐다"며 조사 내용이나 범위 등 계획, 진행 상황도 실시간으로 공유받았다. 이렇게 '브레인' 임씨 등이 세무공무원까지 포섭한 결과, A사는 세무조사에서 가공거래 등 위법 행위가 단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


간이 커진 일당은 이젠 수사기관과 사법부까지 속였다. 2020년 A사의 가공거래 상대업체가 고발 당해 형사재판에 넘겨지자, 세무조사가 A사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 검찰과 법원에 조작된 증거를 제출하거나 직접 재판에 출석해 위증도 했다. 두 사건 재판부는 일당이 증거로 제출한 수수료 자료, 처방전 발급기록 등은 "임의 조작·발급할 수 없는 자료'로 실제 거래 없이 방대한 자료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고, 그대로 확정됐다.

檢, '10년치 리베이트' 진술·증거 확보

10년에 걸친 범행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아냈지만, 일당은 결국 검찰에 덜미를 잡혔다.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조사부(부장 이진용)는 올해 1월 "A사의 하위 CSO 업체가 가공 세금 계산서를 발급해주고, 페이백 받는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착수했다. 2월부터 다섯 달간 7차례에 걸친 압수수색을 통해 범행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A사, 하위 CSO사, 관할 지방국세청·세무서에서 압수한 방대한 양의 증거자료를 분석해 범행 일체를 규명해냈다.

이들이 끌어모은 비자금의 향방도 드러났다. 검찰은 A사 경영진이 10년간 축적한 225억 원 비자금 중 55억 원은 하위업체에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 170억 원가량은 병원을 상대로 한 '리베이트'에 썼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비자금은 전액 현금인 탓에 추적이 어려웠지만, 수사팀은 이런 정황을 뒷받침할 관련 증거도 다수 확보했다. A사 비자금을 전달받은 하위 CSO업체들은 서울 경기 인천 부산 제주 등 전국 곳곳의 개인병원 등을 상대로 이른바 '제약사 리베이트 영업'를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검찰은 170억 원이 전부 리베이트에 쓰였는지 여부 등은 공판 과정에서 면밀히 확인할 예정이다.

검찰은 A사 대표 최씨와 상무 김씨, 뇌물수수 현직 세무공무원 조씨 등 4명을 구속기소하는 등 관련자와 관련 법인 등 총 20명을 재판에 넘기고 사건을 일단락했다. 현재는 △전·현직 세무공무원 금품로비 사건 △횡령 및 조세포탈 등 비자금 사건 재판이 별도 분리돼 진행 중이다. 이달 10일 세무당국 로비 사건은 첫 공판준비기일 절차를 마쳤고, A사 경영진 세 명이 나란히 선 비자금 사건은 이번달 25일 첫 공판이 열린다.

강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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