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인지과학자 김상균 "AI가 문학의 종말 부른다? 인간 작가 역할 커질 것"

입력
2024.09.1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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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억의 낙원'  인지과학자 김상균 인터뷰
뇌과학 기술 거래하는 근미래 배경인 SF소설
AI가 쓴 단편도 QR로 수록… "AI는 창작 도구"

사는 동안 비참하고 괴로웠던 기억을 조작해 좋은 기억만 품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조작몽 동반 안락사’. 기억의 일부를 지우거나 바꾸는 ‘트라우마 기억 재설정술’. 언어를 차근차근 배울 필요 없이 타인의 언어 능력을 이식하는 ‘브로카&베르니케 이식술’.

공상과학(SF) 소설인 ‘기억의 낙원’에 등장하는 과학기술들이다. 이 소설을 쓴 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와 만나 “과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만들어 냈다”면서 “불가능한 기술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과학자’의 말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학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대학원에서 산업공학, 인지과학, 교육공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메타버스 전문가로 활약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과학 분야 책과 소설을 쓴다. 2018년에 쓴 장편소설 ‘기억 거래소’와 ‘기억의 낙원’은 모두 뇌과학 기술을 사고파는 세계가 배경이다. 김 교수는 “공학이나 과학이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소설로 접근하고 싶었다”면서 “강연이나 논문이 아닌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시도해 본 것”이라고 전했다.

‘기억의 낙원’에는 김 교수의 단편소설 ‘발할라의 꿈’을 읽을 수 있는 큐알(QR)코드가 실려 있다. '기억의 낙원'에 등장하는 인공지능(AI)인 ‘발할라’의 시점에서 쓴 스핀오프(본편에서 파생된 작품)로, 김 교수가 아닌 현실의 AI인 챗GPT와 클로드(Claude)가 집필했다. 김 교수는 “AI가 소설 ‘기억의 낙원’을 읽고 소설을 쓰도록 했다”며 “AI가 쓴 글을 종이로 받아보는 데 정서적 거부감을 느낄 일부 독자들을 고려해 책에 싣지 않고 큐알코드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소설 쓰는 과정에서 AI를 활용했다. 친구의 이름을 ‘기억의 낙원’ 주인공에게 붙였더니 AI가 “주인공은 30대로 짐작되는데 50대 남성의 이름을 쓰고 있다”고 지적해서 고쳤다. 또 “내 소설을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시선에서 평론하라고 AI에 지시하자 ‘묘사가 디테일한 지점이 있어서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소설뿐 아니라 칼럼 등을 쓸 때도 AI에 "이 글에 달릴 것으로 예상되는 악플(악성 댓글) 10개를 만들어달라"고 지시해 받아 본 악플을 참고해서 글을 다듬는다고 귀띔했다.

AI가 언젠가 인간을 대체하면 문학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AI는 창작의 새로운 도구”라면서 “오히려 인간 작가의 역할을 풍성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붓질은 잘 못하지만 마우스를 다루는 사람에게 포토샵이라는 기술이 더해진 것과 같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김 교수는 “기술에는 본디 아무런 뜻도 없다”고 했다. 기술의 쓰임을 가르는 건 인간이란 얘기다. 그는 덧붙였다. “작가란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 세계관을 갖고 (창작 과정에서) AI에 곁을 내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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