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조종사는 반드시 '남자'여야만 한다고?

입력
2024.09.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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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장편 소설 '프로젝트 브이'

편집자주

인공지능(AI)과 로봇, 우주가 더는 멀지 않은 시대입니다. 다소 낯설지만 매혹적인 그 세계의 문을 열어 줄 SF 문학과 과학 서적을 소개합니다. SF 평론가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해 온 심완선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거대 로봇이냐, 마법 소녀냐. 그런 선택지가 주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으면 시간 맞춰 텔레비전 앞에 앉아야 하던 때였다. 반 친구들은 다들 만화 주제가를 부를 줄 알았다. 만화 캐릭터 상품 광고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마트에 가면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운동화, 변신 합체가 가능한 로봇 완구, 버튼을 누르면 불빛이 들어오는 요술봉 등이 매대에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여자애'를 위한 선택지는 은연중에 정해져 있었다.

로봇 만화 주인공은 어째서인지 늘 남자애였다. 주인공 캐릭터가 있는 운동화도 어쩐지 '남아용'이었다. 제조사는 운동화를 광고할 때 친절하게도 "여아용도 있어요"라는 사족을 덧붙였다. '여아용'은 보통 주인공보다 비중이 낮은 여자 캐릭터와 핑크색이 들어가는 물건이었다. 정말로 하나같이 그랬다. 그건 갖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주인공을 마다하고 일부러 조연을 골라야 하나. 누가 봐도 선심 쓰듯 깍두기로 끼워주는 꼴인데. 나도 로봇 좋아하는데. 신발 사이즈도 별 차이 없을 텐데. 뭘 저렇게 치사하게 나누고 그런담.

박서련 작가의 '프로젝트 브이'는 어릴 적 품었던 반감을 푹 찌르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우람'은 로봇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리고 탁월한 실력을 지닌 조종사다. 직접 만든 로봇을 타고 세계 대회에 출전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입상할 정도다. 우람이 여성이라는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큰 키나 짧은 머리카락처럼 '여성스럽지 못한' 외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봇 정비사든 조종사든 여자들은 자유롭게 대회에 참가한다. 로봇을 움직이는 데 성별은 상관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우람의 성별이 치명적 결격 사유가 된다.

한국 정부는 '프로젝트 브이'라는 이름으로 거대 로봇을 제작한다. 브이의 조종사는 오로지 남자만 지원할 수 있다. '태권브이'의 파트너는 태권도 소년 '훈'이었고, 이런 문화적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거였다. 한국에서 누구보다 적격자일 우람은 지원 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소설은 거대 로봇을 매개로 삼아 한국 사회에 둥둥 떠다니는 구시대적 편견을 비춘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치사하고 더럽다. 우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한다. 억울함은 있어도 염세나 냉소는 없다. 우람은 쌍둥이 남동생 '보람'의 신분으로 오디션에 지원한다. 물론 부정 참가다. 하지만 잘못된 규정에 대응하기 위한 부정이다. '나도 로봇 좋아하는데'라는 자기주장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에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고 있다는.

이 소설에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포함돼 있다. 우람은 이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음 시행착오를 준비한다. 잘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음에 펼쳐질 로봇 이야기는 '남아용'이 아니라 '성별 불문'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심완선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