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동남아시아 한류 거점 중 한 곳인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연예인은 누굴까. 청춘스타인 한소희? 아니면 차은우? 정답은 박민영.
2000년대 데뷔한 배우 박민영이 베트남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여성 배우로 조사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베트남 사무소가 현지인 1,070명을 대상으로 한류 동향 파악을 위해 올해 4~5월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다.
최근 발간된 '2024 베트남 한류 동향 변화 조사'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47.3%가 박민영을 가장 좋아하는 여성 배우로 꼽았다.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인기가 그 배경으로 꼽혔다. 박민영은 올해 초 방영된 드라마에서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뒤 사망해 그 기억을 안고 10년 전 자신의 몸으로 회귀해 복수한다. 치정극과 판타지를 자극적으로 버무린 'K막장 스토리'가 이제 '한류 스타'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박민영과 함께 이 드라마에 출연한 나인우도 베트남에서 인기 있는 한국 남성 배우 4위(28.1%)로 급부상했다. '별에서 온 그대'(2013)의 김수현과 '꽃보다 남자'(2009)의 이민호 등 그간 청춘 멜로 드라마를 통해 주로 한류 스타들이 탄생한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흐름이다. 베트남에서 '내 남편과 결혼해 줘'는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2021) 등에 이어 세 번째로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드라마로 조사됐다.
반전도 있다. '내 남편과 결혼해 줘'는 베트남 TV나 베트남에서 서비스되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팔린 적이 없는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어둠의 경로'로 이 드라마를 베트남에서 몰래 찾아본 시청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불법 시청을 감수하게 한 'K막장 스토리'의 힘이다.
박민영과 나인우의 사례처럼 요즘 해외에서 한류의 양상은 곳곳에서 달라지고 있다. 해외에서 크게 주목받은 뒤 뒤늦게 국내로 역수입되는 '한류 배우'도 최근 등장했다. 주인공은 채종협. 그는 지난 6월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등에서 네 번의 팬 미팅을 열어 총 3만여 명을 불러 모았다. 2019년 드라마 '스토브리그'로 연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가 팬 미팅을 연 건 국내외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K팝 간판 아이돌 가수도 아니고 국내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크게 높지 않았던 배우가 일본에서 3만 명 규모의 행사를 열기는 이례적이다. 채종협이 주인공으로 출연해 지난 3월 일본 지상파 TBS를 통해 전파를 탄 드라마 '아이 러브 유'가 일본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영향이다. 이 드라마가 일본에서 공개된 뒤 채종협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100만 명대에서 260만여 명으로 껑충 뛰었다.
일본에서 깜짝 한류 스타로 떠오른 채종협은 국내 방송 편성까지 바꿨다. tvN은 채종협이 출연한 드라마 '우연일까?'를 지난 7~8월 내보냈다.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초 촬영이 끝난 이 드라마는 올 초까지만 해도 TV와 OTT에서 자리를 찾지 못해 '창고'에서 대기하며 외면받던 작품이었다. 방송 편성 흐름에 정통한 드라마 제작사 한 관계자는 "채종협이 '아이 러브 유'로 일본에서 새 한류 스타로 주목받으면서 '우연일까?'의 tvN 편성이 갑자기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한류가 현지에서 자생하면서 콘텐츠 자체도 바뀌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선 한국을 배경으로 제작된 종교 소재 영화 '내 사랑의 운명'이 10월 개봉한다. 여성 주인공이 한국 유학이라는 설정이다. 최근 유튜브에 공개된 영화 예고편을 보면, 여성 주인공은 히잡을 두르고 한국의 지하철과 서울 명동 거리를 걷는다. 책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쓴 배동선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인도네시아 통신원은 "한류가 인도네시아의 종교 생활까지 스며들어 생긴 변화"라고 흐름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