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혼란 외면한 '내년 증원 백지화' 고집… 여야의정 협의체에 찬물 끼얹나

입력
2024.09.10 04:30
의협 "2027년 정원부터 논의해야" 주장
입시 혼란 우려에는 "수험생 이해할 것"
일부에선 "합리적 타협안 필요" 현실론
시민사회 "증원 철회, 재고할 가치 없어"

2025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이 시작됐고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 논의도 본격화했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가 겪을 불안과 사회적 혼란에도 일방적 주장을 고집해 어렵사리 마련된 공론장이 출범도 전에 반쪽짜리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내년도 대입 수시모집이 9일 시작돼 전국 39개 의대도 입학 지원서를 받고 있다. 의대 수시 선발 인원은 총모집정원(4,610명)의 67.6%인 3,118명이다. 예정대로 입시 일정을 진행 중인 교육 현장과는 무관하게 의사들은 당장 내년 증원을 철회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날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의대 증원 백지화는 전공의 복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며 "2025년을 포함한 의대 증원 취소가 없으면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응급실 위기, 대학병원 의료진 소진 등을 거론하며 "유일한 해결법은 전공의 복귀"라고 강조했다.

의협은 2025학년도는 물론 정부가 의대 정원 재논의 가능성을 열어둔 2026학년도 증원까지 취소한 뒤 "2027학년도 정원부터 논의하자"고 재차 제안했다. 202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정치권이 민감한 이슈를 피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대 증원을 아예 무산시키겠다는 의도가 깔렸다는 해석도 나온다. 의협은 증원 백지화가 필요한 이유로 의대 교육 파행을 들었지만, 증원 무효로 올해 수험생이 겪을 혼란에 대해서는 "국민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증원 취소는 수험생과 학부모도 이해해 줄 것"이라며 외면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도 2025학년도 증원 철회를 대화 전제 조건으로 못 박았다. 전의교협 관계자는 "입시가 시작됐다고 해서 잘못된 정책을 그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며 "2025학년도 정원 조정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으면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입시 혼란 우려에 대해서는 "수시 결과는 수능이 끝난 이후에 나오니 그때까지 증원 철회가 가능하다고 본다"며 "뜻하지 않은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으나 그건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의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일부는 "이미 입시 절차가 시작돼 내년 증원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합리적 타협안을 마련해야 한다" "의사계가 정원 규모 재조정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같은 현실론도 제기한다. 서울대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도 이날 낸 입장문에서 의정 간 신뢰 붕괴 문제를 지적하며 "정부는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의료인 수요추계를 제시해 더 이상의 논란을 피하기 바란다"고 타협 가능성을 열어 뒀다.

의사들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강경파가 여론을 주도하는 탓에 "여야의정 협의체에 들어가자"는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은 분위기다. 무엇보다 의료 공백을 부른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 철회를 선결 조건으로 내걸어 기성 의사 단체들은 대안을 내놓기도, 협의체에 참여하기도 난감한 처지다. 수도권의 한 수련병원 원장은 "엄밀히 따져 전공의가 의사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다"라며 "의사들이 스스로 원점 재검토 주장에 매몰돼 공론장에 찬물을 끼얹고 사태 해결 기회를 놓쳐버리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2025학년도 증원 철회 요구에 선을 그으며 의료계의 대화 참여를 호소했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비상진료 대응 브리핑에서 "의료 공백 해소를 위한 정치권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의료계가 합리적 근거를 갖고 2026학년도 증원 규모를 제안한다면 숫자에 구애되지 않고 대화할 수 있으니 전향적으로 대화에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도 정부 입장에 힘을 싣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의사 단체의 2025년 의대 증원 철회 요구는 재고할 가치가 없다"며 "전공의 복귀는 필요하지만, 의사들의 불법 행위에 굴복해 증원을 포기하거나 유예한다면 본말이 전도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는 보건복지부 장차관 파면 요구에 대해서도 "의사들의 분풀이를 위해 정책 담당자를 문책한다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의 방향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