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서른에 연인을 만나기란 길 가다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 영화 '파니핑크'엔 이런 대사가 있어요. 집에 가서 발 닦고 이거나 보세요, 결혼할 생각 꿈도 꾸지 말고."
2005년 방송된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결혼정보회사를 찾은 김삼순(김선아)은 중년 남성 직원으로부터 이런 '막말'을 듣는다. 상담 순서를 기다리며 깜빡 졸다 꾼 꿈속에서다. 이런 악몽을 꿀 정도로 김삼순은 나이와 결혼 여부로 트집 잡히는 인물이다. 직장 첫 출근 때 그가 들은 소리는 "아, 꺾어진 육십". 고작 나이 서른에 "노처녀" 취급을 당한 셈이다.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2024년, 낡디낡은 이런 대사는 '퇴출'됐다. 최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웨이브에 공개된 '내 이름은 김삼순 2024'에서 대부분 삭제된 것. 16부작에서 8부작으로 재편집되면서 때론 폭력적으로 비쳤던 남자 주인공 현진헌(현빈)의 비중도 줄었다. 원작을 연출한 김윤철 PD는 "방송 당시엔 '나쁜 남자' 캐릭터를 시청자들이 일부 용인해 줬지만, 진헌의 화법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지금 눈높이에선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진헌의 문제성 장면을) 최대한 편집했다"고 말했다. '백마 탄 왕자'인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이 알고 보니 치워야 할 '똥차 캐릭터'였다는 각성이 약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방송 당시 시청률 50%를 웃돈 2000년대 '국민 드라마'였다. 유튜브에서 다시 보기 조회수가 회차별로 수십만 건을 기록할 정도로 세월을 거슬러 관심을 받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재편집본이 공개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스스로를 위로하는 삼순이 대사들이 보석", "깨지더라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부럽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드라마에 구시대적 캐릭터와 대사들이 잠복해 있지만,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김삼순의 유효기간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주된 반응이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김삼순은 좋아하는 일(파티시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고졸 출신에 대한 차별에 맞섰고, "(남자를) 너무 오래 굶었다"며 성적 욕망도 거침없이 드러낸다. 당시 "김삼순이 결혼과 직업 등에 대한 인식 변화와 성·젠더 의식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일견 진보적"이란 평가(논문 ''내 이름은 김삼순'에 대한 여성 수용자의 해독과 일상적 실천에 관한 연구'·2006)도 학계에서 나왔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나오기 1년 전에 인기를 끈 드라마 '파리의 연인' '발리에서 생긴 일' '황태자의 첫사랑' 등에서 여자 주인공은 죄다 운명의 남성을 만나 인생을 바꿔보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억이 얽힌 옛 콘텐츠로 40대 이상 시청자를 불러 모으고, 김삼순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20대와 30대를 끌어모으려는 게 웨이브의 전략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재공개는 세대를 뛰어넘어 '무한도전' 등 옛날 콘텐츠의 소비가 활발히 이뤄지는 것과 맞물려 있다. 이런 흐름은 △복고 열풍과 △TV와 OTT 등을 통해 쏟아지는 신작 콘텐츠에 대한 피로가 그 배경으로 꼽힌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다매체 시대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구작이지만 재미가 보장된 콘텐츠를 실패 없이 즐기려는 시청자의 반작용"이라며 "영상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1.5배속으로 '빨리 보기'가 새로운 시청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익숙한 옛날 콘텐츠 소비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어떤 옛날 콘텐츠가 새삼 주목받고 있을까. 드라마와 예능 통틀어 가장 많은 시청자가 찾은 옛날 콘텐츠 1, 2위는 '하이킥' 시리즈로 조사됐다. '지붕 뚫고 하이킥'(2009~2010)이 가장 많았고,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이 그 뒤를 이었다. 한국일보가 지상파 방송 3사 콘텐츠를 유통하는 웨이브에 의뢰해 지난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가장 많은 이용자가 본 옛날 콘텐츠(2010년 이전 방송)를 조사한 결과다.
9일 기준 '하이킥' 두 시리즈의 유튜브 총 조회수는 2,700만 건을 넘었다. '하이킥' 시리즈는 3대가 한집에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사건사고와 이웃에 간첩이 살고 있다는 스릴러 요소가 담긴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극이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빵꾸똥꾸"라고 쏘아붙이는 해리(진지희)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들의 독특한 대사는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이미지인 '짤'로 퍼지며 요즘 젊은 세대에도 입소문을 탔다. 나문희가 극 중 며느리로 나온 박해미와 음식 이름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 "호박고구마!"라고 화를 낸 짤의 인기가 대표적이다. '거침없이 하이킥' 대본 작업을 총괄한 송재정 작가는 한국일보에 "대본 회의 중에 한 작가가 '어머니가 호박고구마와 고구마호박을 너무 헷갈려한다'는 얘기를 꺼냈다"며 "'그걸 굳이 일일이 지적하는 식구가 있다'고 해 모두 웃었고 그 상황을 에피소드로 활용했다"고 제작 뒷얘기를 처음으로 들려줬다.
종방한 예능 중에선 '무한도전'(2005~2018)의 이용자가 가장 많았다. 가장 인기 있는 회차는 SBS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짝'을 패러디한 '짝꿍 특집'(2011)이었다. 요즘 예능에선 보기 어려운 캐릭터 쇼의 궁극을 보여준 영향이다.
옛 콘텐츠의 인기는 반대로 지상파 방송사 위기의 증후로도 읽힌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지상파에서 제작하는 요즘 콘텐츠들이 예전만큼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쟁력 약화가 구작 선호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흐름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