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의 폭락장이 연출됐던 '8·5 쇼크'의 악몽이 한 달 만에 되살아났다. 미국발(發) 경기 침체 공포, 인공지능(AI) 거품론 등 가라앉나 싶던 악재들이 3일(현지시간) 세계 증시를 재차 짓누른 결과다. 엔비디아 등 미 대형 기술주를 중심으로 한 '패닉셀(공포에 따른 투매)' 여파에 4일 아시아 증시도 파랗게 질렸다.
이날 한국을 비롯해 일본 등 아시아 주요 주가지수는 일제히 내림세를 보였다. 코스피·코스닥이 각각 3.15%, 3.76%씩, 일본 닛케이225는 4.24%나 하락하며 장을 마쳤다.
이날 새벽 마감한 3일 뉴욕 증시의 암울한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결과였다. 다우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가 1.51%, 2.12%씩 내렸고,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은 3.26% 하락 마감했다. 3대 지수 모두 글로벌 금융시장이 'R의 공포'(R은 경기 침체를 뜻하는 Recession의 첫 글자)에 휩싸였던 지난달 5일 이후 한 달 만에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월가의 '공포지수'로 통하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 지수(VIX)는 이날 33% 급등했다.
미 반도체 대장주 엔비디아가 급락장을 주도했다. 시장 약세 속 'AI 고평가론'과 미 당국의 '반독점 조사'란 악재가 맞물리며 9.53% 폭락한 결과, 이날 하루 새 2,790억 달러(약 374조 원)에 달하는 시가총액을 날렸다. 하루 시총 손실분으로 치면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 다른 반도체 주식들도 덩달아 맥을 못 추면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7.75% 급락했다.
이날 약세장의 단초를 제공한 건 재점화한 미국 경기 침체 우려다. 특히 미 경제를 떠받치는 제조업 지표의 부진으로 경기 둔화 우려가 다시 부각했다. 미 공급관리자협회(ISM)가 발표한 8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7.2로, 5개월 연속 수축 국면에 머물렀다. 경기의 방향을 가늠하는 PMI는 50 미만일 때 경기 수축을 예고한다. S&P글로벌이 발표한 8월 제조업 PMI 역시 47.9로, 전망치(48.0)를 밑돌았다. BMO 캐피털 마켓의 이언 린젠 금리 전략 책임자는 "지표들이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다, 호재로 볼 만한 요소들이 전무했다"고 짚었다.
경기 침체 우려에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해지며 채권 가격(채권 금리는 하락)은 강세를 보였다. 시장금리의 벤치마크인 미 10년물 국채금리는 0.07%포인트 하락한 3.84%를 찍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의 수요 부진까지 맞물리며 국제 유가도 배럴당 약 70달러(서부텍사스산 원유 기준)로 올해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아룬 사이 픽텟자산운용 수석 전략가는 이날 시장 상황을 "우리가 경기 침체 공포를 너무 빨리 잊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고 평가했다.
경기 침체 우려에 시장이 예상하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준이 오는 17,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할 가능성은 43%로, 일주일 전(38%)에 비해 크게 올라갔다. 블룸버그는 월가에서 향후 12개월간 미 금리가 2%포인트 이상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전했다.
시장은 오는 6일 발표를 앞둔 미국의 8월 고용보고서를 '빅컷' 가늠자로 보고 있다. 특히 지난달 발표된 7월 고용 지표가 경기 경착륙 우려를 촉발하며 8월 초 증시를 뒤흔든 만큼, 이번 고용보고서 결과 발표를 앞두고 시장 불안은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