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끼오.’ 열흘 전, 미국령 괌으로 여름휴가를 갔다. 호텔방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소리를 따라가니 호텔 재활용 센터였다. 닭들이 살고 있었다. 길거리에서는 암탉이 병아리 세 마리를 데리고 횡단보도를 건넜고, 해변과 주차장에서도 닭이 불쑥 튀어나왔다. 한국에 길고양이가 있다면, 괌에는 길닭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폭염으로 폐사한 닭의 개체수가 100만 마리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괌의 길닭은 공원의 풀숲에서 더위를 피했다. 무리를 이뤄 사회생활을 했고, 낯선 공간을 탐색했으며, 사람과 상호작용을 했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앤드루 롤러의 ‘치킨로드’를 괌에 가져갔다. 공장식 축산의 끔찍함과 윤리적 결론만 보여줬다면 고만고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롤러는 야생 닭이 사는 정글과 공장식 축산의 다단식 닭장(배터리 케이지), 투계장을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닭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일회용품처럼 닭을 쓰고 버리는 시대다. 지금 우리가 닭에 대해 가진 경험이라곤 주문 30분 만에 산산조각 나 구워져 배달되거나 슈퍼마켓 식육 코너에 나체처럼 전시된 닭의 몸을 보는 것 말고는 없다. 1950년대 소비자본주의가 개막되기 전만 해도 닭의 이런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천 년 전 아시아에서 최초로 가축이 되었을 때 닭은 고기나 달걀을 만드는 동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투계를 위한 오락적 목적이나 제례 의식의 희생 제물로 인간의 곁에 살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본다. 그리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도 질병을 치료하고 닭을 제물로 받았다. 병원과 구급차에 곧잘 뱀이 감긴 지팡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지팡이의 주인이다.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말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
지금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돈을 걸고 투계를 한다. 제국주의 국가가 민중을 도박에 빠지게 하기 위해 은근히 부추겼다는 비판적인 분석이 있다. 반면 투계가 민중 문화의 일부를 이룬다는 시각도 롤러는 차분히 보여준다. 카리브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은 닭을 제물로 바쳤다. 동물 학대라는 여론에 이들은 항변한다.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되고, 다른 목적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
세계 최대의 과학계 행사인 ‘세계지질과학총회’가 지난 26일 부산 벡스코에서 시작됐다. 이번 행사에서 인류세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인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올해 3월 관련 학자들의 투표에서 부결됐다. 총회 기조 강연에서도 인류세에 대한 내용은 슬그머니 빠졌다.
닭은 인류세의 화석으로 가장 인기 있게 거론된 후보였다. 소비자본주의 시대 이후 급증한 닭뼈는 향후 쓰레기장에서 화석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가축이 육상 포유류 질량의 97%를 차지하는 기이한 시대이다. 닭은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잃었다. 닭의 풍부한 의미는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하나로 왜소해졌다. 하지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닭을 보면서 생각했다. 닭은 사라지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