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판결은 복불복?… 소송 일찍 냈다가 배상액 '0원' 엔딩

입력
2024.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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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싸우는 다윗들: ④우연에 기댄 결론]
소송시점에 승·패소, 재판부 따라 배상액 갈려
피해 인정 판결 나와도, 웃지 못하는 피해자들

편집자주

좌익척결, 민간인 학살, 간첩조작, 고문치사…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지배하는 동안 이 나라에선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 기본권을 침해하고 인권을 고의로 외면한 권력 남용 사건이 많았습니다. 민주화 정부 이후 뒤늦게 국가가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과오 자인’이 곧바로 사법부의 ‘국가배상 인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은 왜 국가와의 법정싸움에서 판판이 패소하고 있는 것인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구조적 한계와 정부의 고의적 면피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2022년 8월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마치 승소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폭죽처럼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 선 양민호(68)씨의 심정은 복잡했다. '이제라도 동료들이 피해를 배상받게 돼 다행'이란 안도감과 '한 푼도 받지 못한 난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라는 억울함이 교차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수감자였다. 대학생이던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가 투옥됐다. 정학을 당하고 취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학생운동에 뛰어든 일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독재정권의 산물로 빨간 줄이 그어졌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치욕스러웠다.

희망을 본 건 2013년이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연달아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위헌"이라는 판단을 내놨다. 재심에서도 무죄가 나왔다. 양씨는 이 재심 판결을 토대로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2015년 패소하고 말았다. 그런데 7년 뒤 유사 사건에서는 정반대로 승소 판결이 나온 것이다.

긴급조치 9호, 2022년 판례 변경

같은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들끼리 어떻게 결론이 갈릴 수 있었을까. 이는 이례적인 사례가 아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제기된 손해배상소송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재판에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는 정도는 동일하지 않다. 즉, 피해자 간에 형평성 문제가 생기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양씨의 경우는 '시점'이 이유였다. 그는 재심 직후인 2013년 손해배상 소장을 냈다. 그런데 이듬해 대법원이 다른 긴급조치 9호 사건에서 "고문 등 구체적인 불법행위가 있어야 국가 책임이 인정된다"고 하더니, 2015년엔 "긴급조치 9호 발령 자체가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놨고 이로 인해 졌다.

2년 전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라고 선언했던 대법원이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일 뿐"이라고 손바닥 뒤집듯 판결을 바꾼 걸 두고 당시에도 모순이란 비판이 빗발쳤다. 이때 판결은 법조계를 뒤흔들었던 '사법 행정권 남용' 국면에서 진행된 재판 거래의 일환이었다는 의혹이 나중에 제기됐다.

이후 7년이 지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한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입은 손해에 국가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례를 뒤집었고 이 판결을 근거로 몇몇 피해자들은 승소했다. 하지만 양씨는 여전히 돈을 받을 수 없다. 기판력(확정 판결에 부여되는 구속력)에 의해 법원 심판을 다시 받을 수는 없어서다. 2022년 기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 피해자 974명 중 422명이 배상소송을 걸었지만 193명이 양씨처럼 너무 '신속하게' 소장을 냈다가 졌다.

법원 자율에 맡겨진 '위자료 산정'

소송을 언제 제기했느냐에 따라 누구는 배상을 받고, 누구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만 있는 게 아니다. 재판부별로 정신적 손해배상(위자료) 액수가 다른 건 더 비일비재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는 6월 '선감학원' 사건에선 첫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위자료는 수용 기간 1년당 5,000만 원을 기준으로 책정했다. 국가와 운영주체인 경기도가 공동해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유사 사례로 꼽히는 '형제복지원'(1년당 8,000만 원)에 비해 액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이런 호소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같은 법원 민사합의30부는 지난달 "선감학원 사건은 최소한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수준에서 액수를 결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납북어부 사건에서도 편차가 있었다. 1968년 나포된 제5공진호의 기관장과 선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일수가 각각 388일, 398일로 비슷하지만 이후 유족들이 손해배상소송을 개별적으로 제기한 결과 배당 재판부가 달라져 위자료 액수에 적지 않은 차이가 발생하게 됐다.

"형평성 담보 후속 조치 세워야"

물론 '개별 법관이 해당 시점의 판례를 기준 삼아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사법 체계상 한계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국회로 향한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다. 아니면 형사재판의 '양형기준'처럼 위자료에도 표준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납북어부 사건을 대리한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판결문에도 위자료 계산식이 세세하게 설명되지는 않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며 "신체·정신적 피해가 여럿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을 법원과 사회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이근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