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개봉한 코미디 영화 ‘파일럿’은 이달 13일까지 관객 321만 명을 모았다. 올여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이다. 올해 개봉 한국 영화 흥행 순위 3위에 해당한다. 손익분기점(220만 명)은 오래전에 넘었다. 여장 남자로 출연한 배우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웃음을 적절히 이끌어내는 김한결 감독의 연출력이 결합된 결과다.
‘파일럿’ 흥행으로 올해 개봉한 국내 상업영화 중 7편이 수익을 내게 됐다. ‘시민 덕희’(171만 명)와 ‘파묘’(1,191만 명), ‘범죄도시4’(1,150만 명), ‘그녀가 죽었다’ ‘핸섬 가이즈’(177만 명 상영 중), ‘탈주’(255만 명 상영 중)에 이어 제작자와 투자자 등에 기쁨을 안겨주게 됐다.
‘파일럿’은 ‘시민 덕희’(감독 박영주)와 ‘그녀가 죽었다’(감독 김세휘)에 이어 여성 감독 작품으로는 올해 세 번째로 돈을 번 영화다. 여성이 연출한 상업영화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눈에 띄는 성취다. 불황에 시달리는 영화계에서 “여성 감독들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주류 영화계에서 비주류 취급받던 여성 감독들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따른다.
그간 상업영화 진영에서 여성 감독들의 활동은 저조했다. 임순례(‘리틀 포레스트’와 ‘교섭’ 등), 변영주(‘발레교습소와 ‘밀애’ 등), 이언희(‘미씽-사라진 여자’와 ‘탐정: 리턴즈’ 등), 김도영(‘82년생 김지영’) 감독 등이 듬성듬성 활약하는 정도였다.
독립영화 쪽은 확연히 다르다. 여성 감독이 '지배종'이 된 지 오래다. ‘우리 집’(윤고은)과 ‘벌새’(김보라),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김세인) 등 국내외에서 호평받은 독립영화 대부분은 여성이 메가폰을 쥐었다.
제작비 10억 원 미만 저예산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들꽃영화상 수상 결과에서도 여성 감독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2021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여성 감독 작품(남성 감독 공동 수상 1회 포함)이 대상을 가져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미싱 타는 여자’(이혁래 김정영), ‘수프와 이데올로기’(양영희), ‘절해고도’(김미영)가 바통을 이어 받은 결과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간극은 영화진흥위원회의 보고서 ‘2023년 한국 영화 성인지 결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개봉한 전체 국내 영화 183편 중 여성 감독 작품은 49편이었으나 이 중 상업영화(제작비 30억 원 이상 기준)는 1편(‘교섭’)에 불과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정회원 550명 중 여성 감독이 91명인 점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작은 수치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여성 감독들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는 등 강점을 지니고 있다”면서도 “많은 투자사와 제작사는 상업영화까지 잘 해낼지 여전히 물음표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시민 덕희’와 ‘그녀가 죽었다’ ‘파일럿’의 상업적 성공은 영화계에 전환점을 제공할 전망이다. 여성 감독을 향한 의문은 줄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선아 여성영화인모임 회장은 “여성 감독들이 남성 중심의 상업영화와 달리 여성 캐릭터를 통한 서사를 새롭게 개발할 수 있다”며 “영화계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심 대표는 “‘시민 덕희’ 등 3편은 한국 영화계가 이미 많이 만들었던 장르물이나 이전과는 다른 재미를 주는 공통점을 지녔다”며 “여성 감독들에 대한 통념 변화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감독들에게 여전히 ‘유리 천장’이 남아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제작비 100억 원 넘는 대작에는 쉬 메가폰을 주지 않고 있다는 거다. ‘교섭’(2023)이 여성 감독 영화 최초이자 유일하게 제작비가 100억 원대였다. ‘시민 덕희’와 ‘그녀가 죽었다’ ‘파일럿’ 모두 제작비가 100억 원 아래다. 김 회장은 “여성 감독들이 대작까지 종종 연출해야 ‘유리 천장’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며 “실질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 실시를 비롯해 여성 영화인들이 현장에 안착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기도 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