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지”라고 말하는 한 여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고,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쳐 북한에서 스파이로 일하다 탈북하는 등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그는 이제 요양원, 그것도 치매 진단을 받은 노인들이 있는 A 구역에서 지내고 있다.
주변으로부터 ‘묵 할머니’로 불리는 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인 작가 이미리내의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먼저 주목했다. 영미권의 대형 출판사 하퍼콜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고 지난해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됐다. 영국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여성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는 지난달 번역본이 나왔다.
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이 작가는 “미국에서 먹힐 만한 한국적인 이야기를 쓰겠다는 계획으로 쓴 소설은 아니다”라면서 “워낙 특이한 인생을 사신 ‘이모할머니’의 인생을 써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작가의 말처럼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최고령 탈북자였던 작가의 이모할머니 고(故) 김병녀씨의 인생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여성에게 공부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에도 어떻게든 독학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하시는 분이었다”며 “그만큼 주변에 적도 많고 팬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이모할머니가 소설 속 묵 할머니처럼 일본군 ‘위안부’나 북한 스파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가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을 때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를 되찾으려는 이모할머니와 같은 사람이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을 더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모할머니는 70대의 나이에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다’며 가족을 두고 탈북했을 정도로 결단력과 행동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그렇기에 주인공인 묵 할머니를 참혹한 역사의 피해자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스스로 사기꾼이자 살인자, 또 복수자로 나서는 그의 삶은 “등장인물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에 가까운 이야기를 선사한다.”(미국 뉴욕타임스)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지만, 성장하면서 “비현실적인 꿈을 버리고 현실적인 꿈을 찾게 됐다”는 이 작가다. 결혼 이후 남편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영어로 쓰게 된 소설로 비로소 오랜 소망을 이뤄 소설가가 됐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문학적인 글쓰기를 영어로 해본 경험은 없었기에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이 작가는 “한국에서도 다른 일을 하면서 소설을 썼지만 잘되지 않았다”면서 “영어로 쓴 첫 단편소설을 미국 문예지에 보낸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출판하고 싶다는 답변이 왔다”고 말했다. 출판사 하퍼콜린스와의 계약 때보다 이 순간이 더 행복했다는 그다. 이 작가는 “이제 정말 내 이야기를, 나라는 사람을 알아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황홀함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신나고 행복했다”고 했다.
한국에서 나온 자신의 소설책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이 작가는 국내 독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한 독자님이 남긴 리뷰를 보고 약간 울었어요. 같은 한국인이기에 이 소설을 통해서 하려는 이야기를 다른 설명 없이도 완벽하게 피부로 이해하고 계셨어요. 그건 정말 특별한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