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도 더 빛난 선수들처럼

입력
2024.08.07 18:00
22면
김우진 손 높이 들어준 엘리슨 
중일 선수 기량 칭찬한 신유빈
정치도 상대 인정하는 문화부터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억울할 만했다.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 결승에서 김우진(32)과 붙은 미국의 브래디 엘리슨(35)은 단 0.49㎝ 차이로 아깝게 금메달을 놓쳤다. 그럼에도 엘리슨은 패배가 결정된 순간 먼저 김우진 쪽으로 다가와 양손 하이파이브를 한 뒤 그를 힘껏 안았다. 이어 김우진의 오른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슛오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승리한 김우진도 대단했지만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경쟁자를 추켜세운 엘리슨의 태도도 훌륭했다.

간발의 차였다. 체조 여자 마루에서 미국의 시몬 바일스(27)는 불과 0.033점 차이로 브라질의 헤베카 안드라지(25)에게 뒤져 2등이 됐다. 그러나 바일스는 안드라지가 시상대에 오르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뻗어 마치 경배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예를 갖춘 축하를 해 주자’는 3위 조던 차일스(23)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 바일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주연을 위해 조연을 자처한 바일스 덕에 최고의 시상식 장면이 나왔다.

탁구 여자 단식 경기에서 ‘삐약이’ 신유빈(20)이 보여준 모습도 꽤 의젓했다. 신유빈은 중국의 천멍(30)과 만난 4강전에서 지자 “천멍이 나보다 기량이 더 뛰어났다”며 깔끔하게 승복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의 하야타 히나(24)에게 패한 뒤에도 바닥에 주저앉아 승리의 눈물을 흘리는 상대에게 다가가 포옹한 뒤 등을 다독였다. 신유빈은 “나를 이긴 상대들은 나보다 더 오랜 기간 묵묵하게 노력했다”며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선수단에 첫 메달을 안긴 사격 10m 공기소총 혼성조의 박하준(24) 선수도 결승전에서 패한 뒤 “우리가 중국 선수들보다 기량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유도 최중량급에서 은메달을 딴 김민종(23) 선수도 “하늘이 덜 감동한 것 같다”며 자신의 노력 부족을 먼저 탓했다.

사실 패배를 인정하는 건 길게 볼 때 스스로를 위한 일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상욱(28) 선수가 그랬다. 그는 지난 도쿄 올림픽 남자 사브르 8강에서 오심 논란 속에 1점을 손해 봐 석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오심이 아니라 불안해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저 자신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반성부터 했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한 게 결국 이번 파리 올림픽 2관왕 신화의 발판이 된 셈이다.

이처럼 경기에서 지고도 더 빛난 선수들은 감동을 준다.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우리도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다. 이때 실패를 인정하고 결과를 수긍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상처도 치유되고 미래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유독 정치에선 이처럼 인정하고 승복하는 문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후보에게 단 0.7%포인트 차로 졌다. 패자의 품격을 기대했던 이들은 마치 승자처럼 굴며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 실망했다. 윤 대통령도 할 말은 없다. 48대 47로 간신히 이기고도 100대 0으로 승리한 것처럼 행세했다. 총선 참패 후에도 여전히 거대 야당 지도자를 피의자로 보는 듯했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소통이 될 리 없고 협치도 기대할 수 없다.

물가와 집값이 들썩이는 가운데 티몬·위메프 사태와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증시 발작이 이어졌다.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이고 중동 확전도 일촉즉발 상황이다. 민관정이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극복해야 할 때다. 그 시작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있다. 경제와 민생이 무너지면 모두 패자가 될 뿐이다. 포용과 화합의 올림픽 정신을 정치에서도 보고 싶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