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입고 있던 패딩 점퍼를 입으로 찢어 터져 나온 털을 몸에 뿌린 뒤 차에서 내렸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지난달 31일 1, 2회가 공개된 드라마 '노 웨이 아웃: 더 룰렛' 속 배우 유재명(51)의 모습이다.
그가 맡은 역은 아동 성범죄자 김국호. 출소 후 주민들에게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고 싶어서 한 그의 돌발 행동이었다. 찢긴 패딩에 신발 흙까지 묻힌 건 유재명의 애드리브 연기였다. 집 앞에 몰린 100여 명의 주민이 "동네에서 당장 내쫓아라"라고 소리치자 그는 무릎을 꿇고 '가짜 눈물'까지 흘린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넉살 좋은 동룡(이동휘) 아빠로 나와 친근했던 유재명은 없다.
유재명이 연기한 김국호는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을 떠올리게 한다. "애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 배역을 통해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배우들 중에 가장 먼저 출연을 결정했고요. 물론 (출연이) 부담스러웠고 지인들도 걱정했지만요." 최근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카페에서 만난 유재명의 말이다.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배우였다. 드라마 '굿 와이프'(2016)에서 장애인 변호사로 나와 능글맞게 웃으며 김혜경(전도연)을 궁지에 몰았던 그는 드라마 '비밀의 숲'(2017)에선 '검찰 공화국'의 비리를 폭로한 검사를 묵직하게 연기했다. 그 후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2017)에선 도봉순(박보영)의 아빠로 아내 눈치 보며 집에서 멸치 똥을 따는 풀 죽은 가장을 보여줬다.
20년 동안 부산에서 배우이자 연출자로 무대만 보며 살아오다 2012년 서울로 올라와 새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린다. 무대에서 오래 연기한 만큼 드라마와 영화 속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NG를 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옥좼다. 출구가 없다는 뜻의 드라마 제목 '노 웨이 아웃'처럼 당시 그의 삶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 올라왔을 때 너무 가난했다"며 "영화 제작사 등을 찾아가 직접 프로필 사진 돌리고 번아웃(소진)이 오면서 연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옛 고충을 들려줬다. 서울로 올라온 직후 그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4, 5년 동안 연극 지도도 했다. 그는 "낯선 서울 생활에서 갈 곳이 없을 때 유일하게 정을 준 곳"이라고 추억을 꺼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를 찾는 곳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는 내년까지 출연작이 다 정해졌다. 오는 14일 개봉할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 사건 때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모티프로 한 전상두 역을 연기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면도한 채 4, 5개월을 지냈다"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의 광기가 부각됐다면, 이번 영화에선 개인의 행복을 무참하게 짓밟은 국가적 폭력의 시대 그 권력 안에서 편법과 비상식적인 술수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유재명은 '응답하라 1988'로 얼굴을 알린 뒤 많게는 한 해 7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자신을 "일중독"이라고 했다. "여섯 살 된 제 아이 이름이 '모든'이에요. '모든 게 너의 삶'이란 뜻이죠. 요즘엔 세계 국기를 외우는 게 취미예요.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면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한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쉽지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