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공무원 슬하에서도 예술가는 태어날 수 있다

입력
2024.08.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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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효과 및 메이크업 이펙트 회사였던 KNB EFX Group의 하워드 버거는 자신들의 특수효과 역량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다소 뻔뻔한 영화 시나리오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쿠엔티 타란티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타공인 씨네필이면서 재미에 몰입하는 감독이라면 당시 타란티노를 따라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수효과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타란티노는 후다닥 시나리오를 쓴 뒤 7,000달러의 제작비로 '엘 마리아치'를 만들어 200만 달러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한 로버트 로드리게스를 불러 감독직을 맡겼다. 타란티노가 직접 조지 클루니의 동생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이 영화는 특유의 반어법 대사들과 폭력적인 유머가 영화를 뒤덮는 것은 물론 범죄 스릴러로 시작해 후반부에 갑자기 호러로 전환되는 비약적 스토리텔링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게 된다. 회사의 기술력 홍보를 위한 기획이 예술로 승화된 경우다

얼마 전 극장 개봉해 꾸준히 관객몰이 중인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역시 도쿄 시부야구의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부야구는 17개 공공화장실의 리노베이션을 안도 다다오와 반 시게루, 마크 뉴슨 등 유명 건축가 16명에게 맡기고 벤더스 감독에게는 이에 관한 단편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공무원들은 단순 기록영화나 점잖은 다큐멘터리를 기대했지만 빔 벤더스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오즈 야스지로의 열렬한 팬이었던 벤더스는 차분히 화장실 청소하는 장면들을 '다다미 샷'으로 찍고 거기에 그럴듯한 스토리를 입히면 멋진 극영화가 탄생할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거기에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고지가 가세했다. 나는 그가 출연했던 영화 '우나기'를 정말 좋아해서 글쓰기 강연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빔 벤더스 감독은 혼자 살면서 매일 도쿄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왜 혼자 사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다 고독하고 불행한 존재 아닌가. 하지만 매일 열중할 수 있는 리추얼이 있고 자신이 하는 그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시나리오 작업 3주, 촬영 17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걸 끝냈는데도 결국 작품성을 인정받아 야쿠쇼 고지가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다.

따지고 보면 리들리 스콧의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도 당시 막 피어나기 시작한 특수효과 기술과 비주얼 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고 J.R.R. 톨킨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역시 뉴질랜드 영화 산업을 활성화하고 특수효과와 미니어처 기술을 뽐내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였다. 워너브라더스와 뉴라인시네마는 피터 잭슨에게 대작 판타지 영화를 제작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기술이 발전함과 동시에 웰링턴의 웨타 스튜디오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걸작으로 자리 잡았고 뉴질랜드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뉴질랜드관광청에서 2019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외 방문객 중 18%가 뉴질랜드 방문 목적 중의 하나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꼽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예산과 콘셉트가 이미 정해져 있는 공공 기획물은 숙제하듯이 대충 때워 중간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선수들은 이런 데서 창조력을 발휘한다. 빔 벤더스의 유연한 상상력과 장인의 솜씨 덕분에 도쿄는 명작을 하나 소유하게 되었다.


편성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