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1등부터 5000등까지 의대생 된다고 능사 아냐… 지역인재 뽑고 의과학자 양성해야”

입력
2024.07.31 10:00
10면
[전환점에 선 K의료: ②의대 증원 정책 보완 포인트]
의대 증원에 교수·시설 부족→교육 부실
전공·경력 기준 완화하고, 정부 투자해야
연구·실습 위주 6년 통합 교육과정 개편
지역인재전형·심층면접 등 선발 다양화
"의사 몇 명보다 어떤 의사 배출이 중요"

편집자주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의대 증원을 발표하며 의료개혁 기치를 올린 지 6개월. 의대 정원이 내년부터 대폭 늘어나 의사 인력 부족 해소의 전기가 마련됐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이탈로 촉발된 의료공백은 의료체계를 보다 지속가능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내외 의료현장 취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의료개혁 성공 조건과 보완 과제를 점검한다.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은 향후 5년간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총 5,058명) 방침을 세우고 내년도 모집인원 증원을 사실상 확정하면서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가 전국 40개 의대 전역에서 5개월 넘게 이어지면서, 의사 양성 첫 단계인 의대 교육이 파행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의료개혁이 본궤도에 오르려면 의대생 복귀가 급선무가 됐지만 당장의 전망은 썩 밝지 않다. 전문가들은 정부에 의대 교육 파행의 여파를 최소화할 방책을 주문하는 한편으로, 중장기적으로 신입생 선발부터 교육, 실습, 수련을 망라해 의대 증원의 내실을 다질 교육과정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2,000명 증원, 교수·강의실 확 늘려야

의학 교육의 질을 제고하려면 '2,000명 증원'에 맞는 교육 여건 조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의료계 안팎의 공통된 주장이다. 정부는 의대 증원분 82%(1,639명)를 비수도권 의대에 배정하면서 교육 여건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원이 200명으로 늘어난 전북대 전남대 부산대 등은 기초의학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20명을 훌쩍 넘는다. 교수 1인당 법정 기준 학생 수는 8명이다. 조선대 의대는 기초의학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32.4명에 달한다.

강의실과 실습실, 카데바(해부용 시신) 등 시설과 장비도 부족하다. 의대 교수들은 6~8명이 하던 실습에 20~30명씩 참가하게 되면 학생들이 수술 도구 한번 잡지 못하는 ‘관광 실습’이 된다고 지적한다. 오세옥 부산대 의대(해부학) 교수협의회장은 “늘어난 학생만큼 물리적인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교육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수 충원을 위해선 전공과 경력 요건을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 또한 다음 달부터 3년간 지방 국립대 의대 전임교원 1,000명을 충원한다는 계획하에 교수 문호를 개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자연과학 전공자도 기초의학 교수직에 지원할 수 있고, 개원의 교수 임용 때 경력 인정 비율을 현행 70%에서 100%로 확대하는 규정을 마련한다. 데이터사이언스,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전공 교수 임용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 인재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고 채용 절차를 간소화한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이들 중에 의학 교육 역량이 있다면 채용해 인력 풀을 늘려야 한다”며 “임상에 지나치게 쏠려 있던 의대 교육의 방향을 다변화할 수 있는 기회”라고 평가했다.

교수 충원의 양적 목표 달성에 치중한다면 자칫 의대 교육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이영미 고려대 의대 의학교육학 교수는 “교수 1,000명을 늘리기 위해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뽑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며 “다양한 분야 전문가를 의대 교수로 채용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채용 조건에 맞는 자격을 갖췄는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했다.

교육과정 개편... 의사과학자도 양성

기초의학과 임상으로 양분화한 의대 교육과정 개편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의학교육학회가 올해 초 40개 의대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새로 도입돼야 할 교육과정으로 ‘기초·임상의학과 인문·사회의학 통합’ ‘의사과학자 양성’ ‘조기 임상 노출’ ‘의사소통 능력 강화’ 등이 꼽혔다. 교육부의 관련 법령 개정으로 각 의대가 현행 '예과 2년·본과 4년' 교육과정을 6년 통합 과정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 만큼, 학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기초교양, 인문사회, 임상 등 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게 학회의 제안이다.

이영미 교수는 “요즘에는 의료 기술이나 바이오 의학, 첨단 의료 장비 등을 연구하고자 하는 의사과학자 수요가 많다”며 “입학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오세옥 교수도 “필기시험만 통과한다고 운전면허증을 발급하지 않듯이 모의 진료나 임상 등 풍부한 실습 기회가 필요하다”며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연구하고 토론을 통해 답을 찾는 증례 중심(PBL·Problem Based Learning) 수업도 늘려야 한다”고 했다.

병원 실습을 강화해 환자 중심 교육을 실현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의대생들이 주로 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하는데, 지역의 1, 2차 병원에서도 실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지역사회 및 환자, 지역 의료기관 중심의 교육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은 계명대 이비인후과 교수도 "지역사회의 많은 의료기관에서 임상 실습을 진행하고, 대학병원에서 난치 질환이나 고도의 수술을 담당할 의사는 별도로 선발해 수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적순 아닌 심층 면접 선발

입학 전형에 대한 재고도 필요하다. 지역·필수 의사가 되려는 인재를 선발해 맞춤형 교육을 해야 한다. 비수도권 26개 의대는 내년 신입생 모집인원(3,202명) 중 59.7%인 1,913명을 지역인재전형으로 뽑는다. 신입생을 선발할 때 성적 외에 의료 철학, 직업적 가치 등을 보는 심층 면접도 대안이다. 이미 서울대와 부산대, 아주대 의대 등은 생명의 가치, 윤리의식 등 의사 자질 검증을 위한 다중미니면접(MMI·Multiple Mini Interview)을 도입했다. 정형선 교수는 “수능 1등부터 3,000등까지 모두 의대를 지망하지만 성적이 높다고 좋은 의사가 배출되는 게 아니다”라며 “의대에서 공부할 준비가 돼 있고, 의료 철학이 있는 인재를 선발해 교육과정을 통해 양질의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필수 의사 양성을 위한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도 발의됐다. 국가가 공공의대 입학생에게 학비를 전액 지원하고, 10년간 의료취약지에서 의무복무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윤 의원은 “모든 의사들이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가지 않듯이 지역·필수 의사가 되고자 하는 수요도 분명히 있다”며 “이들에게 혜택을 주고, 질 좋은 교육을 통해 지역에서 일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의사 배출이 중요"... 의대생 복귀할까

정원을 늘린 의대들은 교원 채용, 시설 확충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2월부터 시작되는 의대평가인증기관인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 검증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안덕선 의평원장은 "교수와 시설, 재정은 가장 기본이고 이를 원활히 운영해야 교육의 질이 올라간다"며 "정부 투자 등이 확정되지 않아 증원한 의대들이 검증 요건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김동은 교수도 "몇 명의 의사가 배출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사가 배출되느냐가 국민 건강을 위해 더 중요하다"며 "의대들이 평가인증 요건을 갖췄는지 여부를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의대 교육 여건 개선책은 의대생 복귀와 학사 정상화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서둘러 대책을 내고 집단유급을 막고자 부심하고 있지만, 의대생들이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사실상 대책은 무용지물이 된다. 집단유급이 현실화하든 집단휴학이 이뤄지든, 올해 의예과 1학년(약 3,000명)과 내년 신입생(약 4,500명)을 합친 7,500명이 내년부터 수업을 함께 듣는 최악의 상황도 예상된다. 의사 국가시험, 전공의 수련 등 의사 배출 체계 전반에 장기적 차질도 우려된다.

의대 교수들은 교육 여건의 획기적 개선 약속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대책이 의대생 복귀를 보장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 박형근 제주대 의대 교수는 "증원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며 "정원을 조정하거나 여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영미 교수도 "의대생들이 돌아오지 않는데 의학 교육의 질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미래의 의대생을 위해 현재의 의대생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강지원 기자
손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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