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기술 기업(빅테크)들이 오랜 기간 ‘첨단 기술 배후지’로 여겨졌던 동남아시아를 차세대 거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 매체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5월 이같이 전하며 정보기술(IT) 산업 측면에서 동남아의 달라진 위상을 주목했다. 세계 IT 중심지이자 혁신의 상징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신규 투자가 둔화하는 것과 반대로, 동남아 시장 매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게 매체의 설명이다.
실제 올해 상반기 알파벳(구글 모회사),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첨단 기업 수장들이 각자 돈 보따리를 들고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 각국으로 향했다. 하반기와 내년에도 막대한 투자가 예고돼 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미국 서부 개척시대 ‘골드러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동남아 지역이 글로벌 빅테크의 격전지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구애’의 스타트는 인공지능(AI) 대장주인 엔비디아가 끊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베트남 하노이를 찾아 “베트남 AI 산업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 향후 기술 발전 협력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베트남을 엔비디아의 ‘제2 고향(Second Home)’으로 만들겠다”고도 했다.
또 올해 4월에는 베트남 최대 IT 기업 FPT와 손잡고 베트남에 AI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전략적 협정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 직후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42억 달러(약 5조8,200억 원) 규모 AI 데이터센터 파크를 짓는 방안도 발표했다.
MS도 적극적이다. 지난 4, 5월 사티아 나델라 CEO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을 차례로 찾았다. 당시 그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각각 17억 달러(약 2조3,550억 원), 22억 달러(약 3조480억 원)의 투자 꾸러미를 풀었다. 현지인(인도네시아인 84만 명, 말레이시아인 20만 명)에게 AI 교육을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MS의 인도네시아 진출 29년 만에 최대 규모의 투자”라고 설명했다.
태국에도 첫 데이터센터 건설 방침을 밝혔다. 정확한 투자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 방콕포스트는 10억 달러(약 1조3,817억 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했다. 올해 4월 팀 쿡 애플 CEO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를 연달아 방문해 투자 확대 방침을 밝혔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지난 5월 싱가포르 클라우드 인프라에 2028년까지 120억 싱가포르달러(약 12조 원)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지난해 투자액도 더하면 총 규모는 225억 싱가포르달러(약 23조1,561억 원)에 달한다. 이 자금은 데이터센터 건설, 재생에너지 인프라 개발, 현지 인력 육성 등에 쓰인다.
구글은 5월 말레이시아에 첫 번째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시설 건설을 위해 20억 달러(약 2조7,700억 원)를 투입한다고 밝혔다. 구글의 역대 동남아 투자 중 가장 큰 규모다.
그간 빅테크 기업은 미국과 유럽이 중심인 선진 시장, 그리고 중국을 집중 공략해 왔다. ‘디지털 변방’이었던 동남아 지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이유는 이 지역 AI 시장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에 있다.
안정빈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동남아대양주팀 연구원은 동남아 각국이 ①청년 인구의 높은 디지털 참여도 ②미중 경쟁 속 중립 노선·균형 외교 ③고숙련·저임금 노동력 등을 앞세워 매력적인 투자처로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시민을 모두 합치면 6억7,500명에 달한다. 중국, 인도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특히 20, 30대 청년 비율이 전체의 65%에 달하는 ‘젊고 역동적인’ 지역이다. 그만큼 첨단 기술에 관심이 많고 수용 속도도 빠르다. 상당수는 비디오 스트리밍부터 온라인 쇼핑, 챗GPT 같은 생성형 AI까지 다양한 분야를 활용한다.
또 경제 규모가 커지고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구매력도 상승하는 추세다. 향후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본 기업들이 스킨십을 강화하는 셈이다. 애플의 쿡 CEO는 지난 4월 동남아 3개국을 다녀간 뒤 진행한 콘퍼런스콜에서 “인구가 많고,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으며, 애플 제품이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각 기업의 대(對)동남아 투자 가운데 ‘데이터센터’가 주를 이루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데이터센터는 기업의 IT서버 운영을 위한 핵심 시설이다. 데이터를 처리·유통·저장하고, 사용자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을 관리한다. 세계 각국에 1만여 개가 넘는 센터가 구축돼 있다.
AI 시대가 도래하고 데이터 처리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빅테크 기업은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됐다. IT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남아에서도 데이터센터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상업용 부동산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는 동남아 지역 데이터 저장 수요가 2028년까지 연평균 25%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미국 수요 증가율(14%)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주요 거점 선점을 위해 이 지역에 발 빠르게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는 의미다.
환경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빅테크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열이 발생한다. 이를 냉각시키려면 넓은 공간과 막대한 전력, 많은 물 등이 필요하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OpenAI)가 GPT-4 훈련을 마치기 한 달 전, 데이터센터가 위치한 미국 아이오와주(州) 웨스트디모인 지역 물의 6%가량을 소비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전력과 물 낭비를 우려, 자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다. 일부 주민은 데이터센터 가동 과정에서 과도한 소음이 유발돼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고, 환경보다 경제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는 동남아가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물론 지정학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 성격도 있다. 지금까지 빅테크는 첨단 시설을 주로 중국과 인도에 세워 왔다. 그러나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하고 중국 내 사업 여건도 악화하면서 빠르게 탈(脫)중국에 나서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미중 갈등과 관련, 중립 기조를 표방하는 아세안 국가가 반사이익을 얻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지난 5월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가장 중립적인 곳”이라며 자국을 홍보하기도 했다.
‘의도’야 어떻든, 빅테크의 동남아 진출은 결국 기업과 해당 국가 모두에 ‘윈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은 AI 산업 메카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동남아를 선점하고, 주도권을 경쟁사보다 먼저 확보할 수 있다.
대규모 투자를 받은 동남아 주요국은 AI 인프라를 빠르게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유명 컨설팅업체 AT커니는 2030년쯤 AI가 동남아에서 9,500억 달러(약 977조5,215억 원) 이상의 경제성장 효과를 낼 것이라는 분석도 제시했다. 세계적 석학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올해 초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금융포럼에 참석해 “디지털 고도화는 제3세계인 아시아 신흥국 경제의 ‘선진국 따라잡기’ 효과를 극대화할 기회가 된다”며 아세안을 최고 수혜국으로 꼽았다.
동남아 각국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투자에 미소 짓는 한편, 더 많은 유치를 위해 다양한 혜택 제공에 부심한다. 상당수 국가는 세제 혜택, 관세 면제 등 투자 환경을 대폭 개선하거나 5세대(5G) 네트워크 구축 등 인프라 개선에 나서고 있다.